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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종택 (사진 출처: 영양군청)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한양조씨(漢陽趙氏)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이 17세기 말에 지은 고택이 있습니다. 옥천종택(玉川宗宅)입니다.
옥천종택은 살림채인 정침(正寢), 글 읽는 별당인 초당(草堂), 가묘인 사당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침은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연결된 'ㅁ'자형을 하고 있습니다. 별채는 초당(草堂)이라고 하며, 초가지붕을 하였습니다. 사당은 정침 뒤쪽에 있습니다.
이 고택은 조덕린의 아들 조희당(趙喜堂)을 비롯하여 조희당의 아들 조운도(趙運道), 조술도(趙述道), 조진도(趙進道), 그리고 조진도의 아들 조거신(趙居信) 등 조선의 쟁쟁한 학자들이 태어난 곳입니다.
- 옥천종택의 살림채 (사진 출처: 영양군청)
조덕린(趙德鄰, 1658~1737)은 자(字)는 택인(宅仁)이고, 호(號)는 옥천(玉川)입니다. 호은(壺隱) 조전(趙佺)의 증손으로, 1658년 주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조군(趙頵), 어머니는 풍산류씨(豊山柳氏) 류세장(柳世長)의 딸입니다.
그는 숙종 17년(16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說書), 교리(敎理),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영조 1년(1725년) 10월 사간원(司諫院)의 사간을 사직하며 <을사십조소(乙巳十條疏)>를 올렸습니다. 당쟁의 폐단을 논하는 소(疏) 내용 중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고 하여 함경북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으나, 이로 인해 영남 유생들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는 영조 3년(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에 제수되었으나 사은만 한 후 부임하지 않고 귀향하였습니다. 영조 4년(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가 되어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규합하였으나 곧 난이 평정되어 해산하였습니다. 이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병으로 다시 사직하고 귀향한 후 학문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영조 12년(1736년) 서원(書院)의 남설(濫設)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濟州)로 유배 가던 중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죽었습니다.
- 초당(草堂), 김희수(金羲壽, 1760~1848), 조선 1848년, 39.5 x 64.5 x 5cm,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해서체로 '초당(草堂)'이라고 쓴 현판입니다. 이 현판은 옥천종택 별채인 초당(草堂)의 현판입니다.
초당(草堂)은 조덕린의 아들 조희당(趙喜堂, 1680~1755)이 아버지를 여윈 슬픔을 안고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일에 불경함이 없도록 초가집으로 검소하게 지었다고 합니다.
초당(草堂)은 '짚으로 지붕을 만든 작은 집'을 뜻합니다. 즉 세찬 바람에도 굳건하게 서 있는 풀과 같은 작은 집을 말합니다. 초당(草堂)은 조희당(趙喜堂)의 당호(堂號)이기도 합니다.
현판 좌측에 '외손 생원 김희수 팔십구 근서(外孫生員金羲壽 八十九謹書)'라고 쓰여 있습니다. 글씨는 동원(東園) 김희수(金羲壽, 1760~1848)가 89세 졸년(卒年, 1848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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