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에서 바라본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경주 함월산 남쪽 기슭에 골굴암(骨窟庵, 지금은 골굴사로 이름이 바뀜)이 있습니다. 골굴암의 연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기림사의 암자였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원효대사가 열반에 든 혈사(穴寺)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으로 올라가는 길 이곳에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 바위가 있습니다. - 석굴 석회암 바위 절벽에는 여러 개의 석굴과... - 법당굴 법당굴이 있습니다. -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바위 절벽 제일 높은 곳에 마애불이 있습니다. 마애불은 머리 위에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 윤곽이 뚜렷합니다. 타원형의 두 눈썹 사이로 백호(白毫) 자리가 둥글게 파여 있으며,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채 멀리 바라보고 있습니다..
- 어물동 마애불 울산(蔚山)의 동북쪽인 북구에 어물동(於勿洞)이 있습니다. 이곳에 어물동 마애불이 있습니다. '어물'(於勿)이란 지명은 이곳 서쪽의 산세가 완만하게 길게 늘어져 있어 이것을 이두식(吏讀式)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마애불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불과 수십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부근에 살고 있던 김불불이라고 하는 사람이 꿈에 부처님을 보고 난 후 이 일대를 샅샅이 뒤진 끝에 찾았다고 합니다. 당시 바위가 담장이 넝쿨로 온통 뒤덮여 있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애불은 커다란 사암제(砂岩製) 바위 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암벽의 재질이 견고하지 못한 탓에 손상이 심해 그 형상이 분명치 않습니다. 바위 크기는 높이가 약 7m, 폭이 약 10m에 이릅니다. 가운데에 본..
- 여원치 마애불 남원(南原)에서 운봉(雲峰) 쪽으로 가다 보면 고남산(古南山, 846m)이 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고남산을 태조봉이라 합니다. 그 연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말 우왕 6년(1380년)에 인월면 인월리에 진을 치고 왜구 2천여 명을 이끄는 왜장 아지발도에 맞서기 위하여 한양에서 출발하여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가 운봉 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족하여 이곳에 올라 성을 쌓고 산신제를 올려 승리를 기원하였습니다. 이성계는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무찔렀습니다. 그 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 태조봉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 여원치 마애불 도로 사정이 지금과 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남원과 운봉, 함양을 왕래할 때 고남산을 가로지르는 고개인 여원치(女院峙)를 넘어..
- 마애불로 올라가는 입구 남원(南原) 신계리(新溪里)는 예전에 누에가 섶에 올라 집을 짓는 노잠등신(老蠶登薪)의 형국이라고 해서 섶갓 또는 신촌(薪村→新村)이라 하였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계리로 불리던 마을과 합치면서 신촌과 월계의 이름을 따서 신계리가 되었습니다. 신계리 신촌마을 뒤편에 풍악산이 있습니다. 그 남동쪽 기슭에 신계리 마애불이 있습니다. 그곳 임도(林道) 길가에 마애불로 가는 표시판이 있습니다. - 마애불로 가는 산길 마애불은 표시판이 있는 곳에서 완만한 경사의 산길을 따라 한동안 올라간 곳에 있습니다. 표시판에는 마애불까지 50m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00m 남짓 됩니다. - 신계리 마애불 마애불은 높은 언덕바지에 있습니다. - 신계리 마애불 좀 더 가까이 다가가 ..
- 북지리 마애불 춘양목(春陽木)과 송이버섯으로 유명한 경북 봉화(奉化)... 그곳 북지리(北枝里)에 손바닥만 한 작은 절 지림사(智林寺)가 있습니다. 지금 지림사가 있는 일대는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된 지림사터라고 하며, ‘한절(큰절)’이라는 절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지금의 절 이름은 옛 절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사세가 계속 이어져 왔다기보다는 옛 절터에 암자격의 절이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 바위에 높이가 4m 넘는 거대한 마애불이 있습니다. 북지리 마애불입니다. 바위를 파서 감실형으로 둘레를 잡고 그 안에 부처를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감실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없습니다. 이 마애불은 삼국통일이 이루어지던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