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늠비절터의 사리탑 큰 늠비절터에서 늠비봉 오층석탑이 서 있는 쪽으로 내려오면, 부흥사로 내려가는 길과 늠비봉 오층석탑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부흥사 쪽으로 내려가는 길과는 반대쪽으로 작은 오솔길이 하나 나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사리탑 하나가 길가에 넘어진 채 있습니다. 이곳은 늠비봉 오층석탑이 있는 곳(작은 늠비절터)에서 동남쪽으로 약 65m 떨어진 곳입니다. - 사리탑 사리탑은 받침돌과, 그리고 지붕돌과 하나로 된 몸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리탑이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옮겨가려다 이곳에 놓아둔 것이라고 합니다. - 사리탑 도면 받침돌은 네모꼴로, 1단 받침이 있습..
- 남산 국사골 마애불 남산 부석에서 능선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지암골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이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지암골에서 올라오는 길과 반대쪽으로 급한 비탈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까마득한 절벽 위에 좁은 터가 나타납니다. 이곳 자그마한 바위의 앞면에는 투박한 모습의 마애불 하나가 새겨져 있습니다. 왜 이곳에 이런 마애불을 새긴 것일까요? - 마애불에서 내려다본 국사골 남산 국사골과 지암골은 민속신앙의 기도처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무속인들이 많이 찾고 있는 이 골짜기에서 바위굴을 이용한 기도처 여러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국사골에서도 이곳은 가장 깊고 높은 곳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앞을 내려다보면 국사골을 한눈에 다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왜 굳이 이런 곳..
- 남산 국사골 제4사지 삼층석탑 국사골(國師谷)은 동남산에서 세 번째로 큰 골짜기로, 그 길이가 1.2km쯤 되는 비교적 긴 골짜기입니다. 이곳에는 여러 절터와 함께 고깔바위, 남산 부석, 상사암 등의 바위들이 있습니다. 국사골에 관한 기록은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사(實際寺)의 스님 영여(迎如)는 그 씨족은 알 수 없으나, 덕과 행실이 모두 높았다. 경덕왕(景德王)은 맞이하여 공양하고자 사신을 보내어 그를 불렀다. 영여가 대궐에 가서 의식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하니, 왕은 사신을 보내어 절까지 전송하게 하였다. 영여는 절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숨어버려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사신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국사로 추봉(追封)하였다. 그 이후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
-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바로 곁에 탑비 하나가 서 있습니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實相寺 秀澈和尙 楞伽寶月塔碑)입니다. 이 탑비는 비신은 푸른 돌로 되어 있고, 비머리(螭首)와 받침돌(臺石)은 화강암입니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 그리고 부도를 세운 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철화상(秀澈和尙)은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원사의 스님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비문에는 '深源寺□國師秀澈和尙(심원사□국사수철화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이 탑비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세운 것으로 여겨지는데, 본래의 탑비는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의 비문은 조선 숙종 40년(1714년)에 탁본을 가지고 다시 새긴 것입니다. 비문은 마멸과..
-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실상사 극락전을 향한 그 오른쪽에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이 있습니다. 이 부도는 실상사의 제2조사(第二祖師)인 수철화상의 부도로, 높이가 2.42m입니다. 수철화상(秀澈和尙)은 신라 후기의 스님으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 번 째 창건주가 되었습니다. 진성여왕 7년(893년)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秀澈)'이라 하고, 탑호를 '능가보월(楞伽寶月)'이라 하였습니다. -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부도는 통일신라시대 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높직한 팔각지대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대석은 팔각형으로, 1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모가 심해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희미하게나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