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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법흥사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로 건너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은 뒤 선덕여왕 12년(643년)에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후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에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하였고, 마지막으로 영월에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했습니다. 이때 절 이름이 흥녕사(興寧寺)였습니다.
그 뒤 통일신라시대 말에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년)이 당시 흥녕사를 사자산문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습니다. 흥녕사는 고려 혜종 1년(944년)에 중건되었으나, 이후 큰 화재를 만나 1,000년 가까이 명맥만 이어왔습니다. 그러다가 1902년에 다시 중건되면서 법흥사(法興寺)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법흥사에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징효대사 부도비와 부도입니다. 징효대사는 통일신라시대 말 구산선문 가운데 사자산문(獅子山門)을 연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798~868년)의 제자로, 흥녕사에서 선문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 징효대사 부도비
부도비는 귀부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를 얹은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습니다. 제액에는 '고징효대사비(故澄曉大師碑)'라고 전서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 귀부
지대석과 귀부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습니다. 턱을 앞으로 쑥 내밀고 있는 거북의 머리가 진취적입니다. 콧대가 우뚝한 데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 험상궂어 보입니다.
귀부의 등에는 육각의 귀갑문이 있고, 귀갑문 안에는 다시 4엽의 꽃무늬가 있습니다.
- 비좌
귀부 등 위에 비좌가 있습니다. 비좌에는 면마다 구름무늬가 있고, 윗면에 연꽃무늬가 돌아가며 있습니다.
- 징효대사 부도비
귀부의 네 발은 사각형의 지대석을 딛고 있습니다. 다섯 발가락이 부드럽게 표현되었습니다.
이수에는 네 모서리에 한 마리씩, 모두 네 마리 용이 있습니다. 이들 용은 모두 목을 길게 뽑고 머리를 가운데로 내밀어 화염에 싸여 있는 보주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투고 있습니다.
- 징효대사 부도비
비문은 왕명에 따라 고려시대 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최윤(崔潤)이 쓰고, 최환규(崔奐規)가 새겼습니다. 징효대사는 900년에 입적한 후 906년에 시호를 받았습니다. 왕은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나, 그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비문은 924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비의 건립은 그로부터 20년 후 전쟁으로부터 나라가 평온해진 고려 혜종 1년(944년)에 이루어졌습니다.
- 징효대사 부도
징효대사 부도는 징효대사 부도비의 왼쪽 옆 약간 경사진 곳에 있습니다. 이름 모를 스님의 부도와 함께 있습니다.
- 징효대사 부도
부도는 부도비보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습니다.
- 기단부
하대저석의 면마다 안상무늬가 1구씩 있고, 하대석에는 앙련과 귀꽃이 있습니다. 중대석에는 면마다 모서리기둥이 있고, 상대석에는 복련이 있습니다.
- 탑신부와 상륜부
몸돌은 아래 윗변의 모서리를 약간 죽였습니다. 앞면과 뒷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비장식이 있습니다. 지붕돌에는 여덟 귀퉁이마다 귀꽃이 높게 솟아 있습니다. 상륜부에는 보개와 보주가 있습니다.
- 징효대사 부도
사자산 연화봉 아래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징효대사 부도가 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자궁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이곳 절집들이 다소 어수선하게 늘어섰어도, 이 주위는 여전히 아늑하고 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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