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행나무 밀양강이 바라보이는 추화산 자락의 언덕에 오연정(鼇淵亭)이 있습니다. 오연정으로 올라가는 길옆 높은 곳에 노랗게 물든 노거수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이제 겨울이 가까웠음을 느끼며 오연정으로 올라갑니다. - 대문채 앞 공터 오연정 대문채 앞에 너른 공터가 있습니다. 이곳에 은행나무, 팽나무,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 경행재 문간채를 지나 오연정 안으로 들어갑니다. 문간채 이름은 경행재(景行齋)입니다. '경행(景行)'은 시경(詩經)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시경에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뜻은 '높은 산은 우러러보기 마련이고, 좋은 행실은 따라 해야 마땅하다'입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공자에게 위와 같은 찬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 경행재 경행재 모습입..

- 느티나무에서 바라본 오운 마을 의령군 낙서면(洛西面) 전화리(全火里)는 낙서면의 서쪽 지역으로, 낙동강 강가의 골짜기에 있습니다. 이곳 마을로는 방계(芳溪), 오운(五雲), 부곡(釜谷)이 있습니다. 전화리(全火里)의 의미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옛날 삼동(三冬) 한철 빼고는 늘 강물이 범람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재난에 대한 비보책(裨補策)으로 삼기 위하여 물과 상극인 불을 취하여 '전화(全火)'라 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감실과 율산(栗山) 쪽으로 통하는 소두방재(솥뚜껑을 소두방이라 함)와 정골(솥골), 숯골 등의 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지명에 맞추자고 불(火)을 마을 이름으로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오운(五雲) 마을은 방계와 부곡 마을 사이에 있습니다. 전래 지명은 오오니, 구름실..

- 박연정 밀양 동창천(東倉川)이 상동면 매화리(梅花里) 서남 절벽 아래로 급하게 흘러 내려와 고정리 모정(慕亭) 마을 앞에 이르러 강폭이 넓어지면서 제법 널따란 연당들(蓮塘坪)을 이룹니다. 모정 마을 앞에서 청도군(淸道郡)으로 건너가는 나루터를 옛날에는 로진(魯津)이라 하였고, 마을 이름을 고답(高畓) 또는 로진촌(魯津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정 마을은 고답리(高畓里)에 속해 있으면서 로진촌(魯津村)으로 불려 왔습니다. 모정(慕亭)의 원래 표기(表記)는 모정(茅亭)입니다. 모정(茅亭)은 임진왜란 이전에 이 마을 서쪽 강가 바위 위에 있었던 모옥(茅屋, 띠집)의 정자로 인하여 생긴 지명인데, 후일에 같은 음(音)을 취한 모정(慕亭)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정 마을 입구의 도롯가에 박연정(薄淵亭)이 있..

- 칠인정 포항시 북구 흥해읍 초곡리(草谷里)는 '포항의 두문동(杜門洞)'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초곡리를 사일(士逸)이라 하였습니다. 이 골짜기가 '선비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은거지'라는 뜻입니다. 초곡리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의 집성촌입니다. 흥해파(興海派)의 파조이며 이 마을 입향조인 장표(張彪)가 초막을 짓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서 초막골 또는 초곡이라 하였습니다. 이곳에 칠인정(七印亭)이 있습니다. - 칠인정 장표(張彪, 1349~?)는 고려 말 공민왕 때 흥의위(興義衛) 보승랑장(保勝郞將)을 지냈습니다. 흥의위는 중앙군인 이군육위(二軍六衛) 중 3번째 군단입니다. 전체 병력은 보승 7령 정용 5령 도합 12령에 1만 2천여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낭장은 정6품 무관직으로, 휘하에..

- 곡강정 밀양시 초동면 검암리 낙동강 강가에 곡강정(曲江亭)이 있습니다. 이 정자는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된 성산군(星山君) 이식(李軾, ?~?)의 유업이 깃든 정자입니다. 이식(李軾)은 벽진(碧珍: 성주 지역의 옛 지명) 사람으로, 자(字)는 자담(子膽), 호(號)는 동파(東坡)입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만도첨사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중종반정 이후 권신(權臣)들이 중종의 비(妃) 신씨(愼氏)를 폐출하자 정쟁(政爭)을 피해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려준 땅)인 이곳으로 내려와 주변의 절경과 풍치를 벗 삼으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누렸습니다. - 곡강정 이식(李軾)의 아들 판관공(判官公) 이덕창(李德昌)은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