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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포항 칠인정과 느티나무

sky_lover_ 2023. 6. 23. 07:05

- 칠인정

 

포항시 북구 흥해읍 초곡리(草谷里)는 '포항의 두문동(杜門洞)'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초곡리를 사일(士逸)이라 하였습니다. 이 골짜기가 '선비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은거지'라는 뜻입니다.

초곡리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의 집성촌입니다. 흥해파(興海派)의 파조이며 이 마을 입향조인 장표(張彪)가 초막을 짓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서 초막골 또는 초곡이라 하였습니다. 이곳에 칠인정(七印亭)이 있습니다.

 

- 칠인정


장표(張彪, 1349~?)는 고려 말 공민왕 때 흥의위(興義衛) 보승랑장(保勝郞將)을 지냈습니다. 흥의위는 중앙군인 이군육위(二軍六衛) 중 3번째 군단입니다. 전체 병력은 보승 7령 정용 5령 도합 12령에 1만 2천여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낭장은 정6품 무관직으로, 휘하에 2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중간 간부입니다.

 

그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군불사(二君不事)를 외치며 고향인 인동(仁同, 지금의 구미)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성계 정권의 호출이 계속되자 그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첩첩산중인 도음산(禱蔭山) 아래 들어가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장표를 '초막 할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장표는 슬하에 4남 3녀, 7남매를 두었습니다. 자신은 은거하지만 자식까지 출사를 금할 수는 없다며 자식들에게 벼슬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네 아들과 세 명의 사위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장표의 회갑을 기념하여 초곡리에 정자를 세웠습니다.

 

이 정자가 바로 칠인정(七印亭)입니다.

- 칠인정

 

조선 태종 9년(1409년) 정자 낙성식을 거행할 때 장표의 네 아들인 장을제(乙濟), 장을하(乙河), 장을해(乙海), 장을포(乙浦)와 세 사위인 유정봉(柳廷鳳), 이읍(李邑), 이현실(李玄實)이 모두 관인(官人)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은 칠인정 바로 앞에 기이한 형상의 쌍괴수(雙槐樹)를 심고, 그 나무에 각자 자신들의 벼슬을 증명하는 인수(印綏) 7개를 걸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정자를 칠인정(七印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자가 세워진 지 336년이 지난 영조 21년(1745년) 을축년(乙丑年) 가을에 풍우(風雨)로 정자는 붕괴하고 쌍괴수도 바람에 꺾어지고 뽑혔습니다. 이때 칠인정의 재건에 앞서 쌍괴수의 복원을 먼저 하였다고 전합니다. 지금의 칠인정은 정조 21년(1797년) 중창하였습니다. 그 후 1904년, 1986년, 1993년 세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 칠인정

 

칠인정은 누각 형태로 건축되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가운데에 마루를 두었습니다. 아래층에는 양쪽 방에 불을 지피는 함실을 마련하였고, 나머지 공간은 개방되었습니다.

정자를 마주 서서 볼 때 왼쪽 방은 '효우재(孝友齋)', 오른쪽 방은 '경수당(慶壽堂)'입니다. '효우(孝友)'라 이름한 것은 후손들에게 부모와 조상에게 효도하고 형제애를 돈독히 하라는 당부이고, '경수(慶壽)'라 이름한 것은 네 아들과 세 사위가 장표의 생일에 모여 축수한 일을 기념하였습니다.

 

정조 때 초서의 대가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중창 후 쓴 '칠인정(七印亭)' 현판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손상되어 문화재청에서 수거하고 지금의 현판으로 바꿔 달았다고 합니다.

 

- 칠인정

 

정자 내부에는 '칠인정기(七印亭記)', '칠인정중수기(七印亭重修記)' 등이 걸려 있습니다. 정조 때 문인 남경희(南景羲, 1748~1812)가 쓴 '칠인정기'는 마루 한가운데 걸려 있습니다.

이 기문에는 "장표 공은 새 왕조 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면서 자손은 벼슬에 나가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의(義)가 없다고 하여 마땅히 의(宜)를 좇았다. 지금 임금도 성군이요 공도 당세의 절의사인데 세상이 야은(冶隱) 길재(吉再)나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만 절의군자로 칭송하면서 공은 알아주지 않으니 나타내고 묻어지는 것이 때가 있는가?"라며 세상이 장표의 절의를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 칠인정

 

1986년 칠인정을 중수한 후손 장택영이 쓴 '칠인정중수기'에는 장표가 임종할 때의 유언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집안은 10대로 고려의 충신이었고 나는 고려시대 태어나 나라가 망하였으나 따라 죽지 못하였다. 나의 수연(壽宴)에 그대들이 헌수(獻壽) 함은 자식 된 도리로 당연하겠으나, 나는 어버이를 잃은 슬픔보다 더하다. 나는 옛 신하 복장으로 선왕을 뵐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조선의 은혜를 입었으니, 힘을 다해 내 조상이 고려를 섬긴 심정으로 임금을 섬겨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아라."

 

- 칠인정

 

정자는 마을 뒤 정남향으로 경사면에 지어져 있어 출입구를 뒷면에 두었습니다.

 

- 회화나무

 

정자 담장 밖에 노거수 회화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 회화나무

 

이 회화나무는 칠인정 느티나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연못

 

칠인정 앞쪽에 정자 앞을 흐르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만든 연못이 있습니다.

 

- 연못

 

연못 형태는 방지방도(方池方島) 형태입니다.

 

지금 연못은 예전 연못 모습을 재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위적인 석축으로 멋이 덜해졌습니다.

 

- 배롱나무

 

연못 주변에 노거수 배롱나무 세 그루가 있습니다.

 

13대손 이계(耳溪) 장사경(張思敬, 1756~1817)의 '정하축소담(亭下築小潭)'란 시를 볼 때 순조 연간에 연못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축조 시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때 연못 주변에 배롱나무 세 그루를 심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본체(本體)가 수명을 다해 고사한 뒤 그루터기에서 맹아가 형성되어 자라서 대신하고 있습니다. 나무 높이는 4m 내외이며, 수관폭은 5~6m에 이르고 있습니다.

 

- 칠인정과 느티나무

 

정자 앞에 노거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그래서 칠인정을 쌍규정(雙槻亭) 또는 쌍괴정(雙槐亭)이라 하기도 합니다.

 

- 느티나무

 

영조 21년(1745년) 가을에 태풍에 쌍괴수(雙槐樹)가 부러져 다시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이 나무가 지금 칠인정 느티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 나무가 담장 밖 노거수 회화나무일 수도 있습니다. 흔히 '괴(槐)'자를 회화나무 또는 느티나무로 혼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자를 처음 세울 때 인수(印綬)를 걸었던 쌍괴수는 느티나무가 아닌 회화나무로 추정됩니다.

 

회화나무가 개화할 무렵 중국에서는 과거 중 진사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이 시기를 괴추(槐秋)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과거를 보러 가거나 또는 과거에 합격하였을 경우 집안에 회화나무를 심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 느티나무

 

칠인정 느티나무 중 한 그루는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일부 가지가 절단되었다고 합니다.

 

이 느티나무는 한국전쟁 등 나라의 우환이나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우우~' 하고 소리를 내서 '우는 느티나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최근 들어 마을 근처가 급속히 개발되면서 울음소리가 멈췄다고 합니다.

 

- 느티나무

 

수령: 약 300년.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3.1m.
소재지: 포항시 북구 흥해읍 초곡리 825.

 

(202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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