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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동 마을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書院里)는 자계서원(紫溪書院)이 있는 마을로, 1400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 김극일(金克一)이 입향하여 정착한 김해김씨 집성촌입니다.

예전 지명은 운계리(雲溪里)이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죽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신원이 회복되어 탁영 김일손 등을 배향한 서원이 '자계(紫溪)'라는 사액(賜額)을 받고부터 서원리(書院)가 되었습니다.

 

탁영 김일손이 무오사화로 극형을 당해 죽자,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핏빛으로 물들어 3일간 역류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마을은 미동(美洞)과 신기(新基) 등이 있습니다.

- 자계서원

 

자계서원(紫溪書院) 서원리 미동 마을의 야산 자락 아래에 있습니다.

 

이곳은 원래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공부하던 운계정사(雲溪精舍)였습니다. 그가 무오사화 때 화를 입고 죽은 후 중종 13년(1518년)에 청도 지역의 유생들이 뜻을 모아 그의 학문과 덕행을 배향하기 위해 사당으로 바꾸고 자계사(紫溪詞)라 하였습니다.

 

선조 11년(1578년)에 사당의 중수와 함께 학사, 곳간 등이 새로이 세워져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7년(1615년)에 다시 짓고 김극일(金克一)과 김대유(金大有)를 더하여 모셨습니다. 현종 2년(1661년)에 '자계(紫溪)'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습니다.

 

고종 8년(1871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복원되었습니다.

- 자계서원

 

자계서원의 건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솟을삼문인 유직문(惟直門), 서원에서의 여러 행사를 하거나 학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인 영귀루(詠歸樓), 강당인 보인당(輔仁堂),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생활 공간인 동재와 서재, 사당인 존덕사(尊德祠), 제사 준비를 하는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습니다.

 

- 은행나무

 

자계서원 앞뜰 한쪽에 노거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뒤쪽 은행나무가 원래의 나무이고, 앞쪽 은행나무는 뒤에 심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자계서원 은행나무 - 김덕남

한 시대 몸을 던져 어둠을 걷어내듯
시퍼렇게 날이 선 심지 하나 품은 채
알알이 뛰어내리는 사초 속의 등불이다

깃털 같은 목숨에도 가슴은 천근만근
감싸 맸던 울음 풀면 어느 강에 넘치려나
금이 간 밑동을 뚫고 벼린 붓이 솟는다

붉은 획 내리그은 절명시가 저러할까
한 목숨 뒤흔드는 외곬의 바람 앞에
파란도 만장도 아닌 결기 하나 꽂는다

 

- 은행나무

 

은행나무 근처에 탁영 김일손의 문학비가 있습니다. 문학비에는 그가 26세이던 1489년 4월 29일 섬진강에서 두류산(頭流山, 지금의 지리산)을 읊은 시가 적혀 있습니다.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소리 부드러워  / 滄波萬頃櫓聲柔

소매에 찬 맑은 바람 가을인 양 서늘하다  / 滿袖淸風却似秋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  / 回首更看眞面好

흰 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을 넘어가네  / 閒雲無跡過頭流

 

- 은행나무

 

수령: 500년.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4.4m.
소재지: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13.

 

(20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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