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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고헌 부근 소나무
계절은 가을입니다. 하늘은 파랗고, 온 산은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갈아입는 가을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우리네 세상사는 힘들고 우울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사를 잠시 잊고 가을바람에 실려 횡계구곡으로 떠납니다. 횡계구곡(橫溪九曲)은 영천 화북면 횡계리에 있는 횡계(橫溪)의 아홉 구비를 말합니다.
- 모고헌
조선 시대 학자인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 1664~1730)과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1667~1732) 형제는 횡계의 아홉 구비에 각각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횡계구곡이라 하였습니다.
1곡(曲)은 쌍계(雙溪), 2곡은 공암(孔巖), 3곡은 태고와(太古窩), 4곡은 옥간정(玉磵亭), 5곡은 와룡암(臥龍巖), 6곡은 벽만(碧灣), 7곡은 신제(新堤), 8곡은 채약동(採藥洞), 9곡은 고암(高巖)이 하였습니다. 지금 7~9곡은 횡계저수지로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횡계구곡 가운데 가장 뛰어난 3곡을 찾아갑니다. 3곡 태고와는 모고헌(慕古軒)입니다. 지금 이곳은 가을 속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지나가는 바람에 나뭇잎이 비가 되어 우수수 떨어집니다.
- 느티나무
'횡계구곡'이란 명칭은 태고와와 옥간정이 지어진 후에 붙여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태고와는 정규양이 나이 35세(1701년)에 지었고, 옥간정은 50세(1716년)에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횡계구곡이란 명칭은 정규양의 나이 50세 이후에 붙여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두 형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과 형조참의 정중기(鄭重器) 등 많은 명현과 석학들을 길러내었습니다. 두 형제의 호인 훈수(塤叟)와 지수(篪叟)는 훈(塤)과 지(篪)라는 악기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이 두 악기는 언제나 함께 편성되었고, '훈지'(塤塤)는 형제간의 우애에 비유하였습니다.
- 모고헌
모고헌 담장을 돌아 안으로 들어서면 냇가 낭떠러지 위에 멋진 누각이 있습니다. 모고헌입니다.
- 횡계서당
모고헌 뒤쪽에는 1927년에 후손들이 세운 횡계서당이 있습니다. 건물 정면에 '횡계서당'(橫溪書堂)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모고헌
모고헌은 정규양이 35세 되던 해인 1701년에 지은 누각입니다. 원래는 태고와라 하였는데, 1730년에 제자들이 고쳐 지으면서 스승을 그리워하는 뜻의 모고헌(慕古軒)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사방에 툇간을 두른 독특한 정사각형 평면구조입니다. 중앙에 작은 방이 있습니다.
- 현판(2011.3.20.)
누각 출입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각 안에는 현판 두 개가 걸려 있습니다. 하나는 누각의 원래 이름인 '태고와'(太古窩)라 쓴 현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이름인 '모고헌'(慕古軒)이라 쓴 현판입니다.
태고와(太古窩)에서 '와'(窩)란 움집을 말하니, 처음 지었을 때의 누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소박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고헌(慕古軒)에서 '헌'(軒)은 추녀집을 말합니다. '와'(窩)에서 '헌'(軒)으로 변한 이름에서도 누각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모고헌
정규양은 35세(1701년)에 횡계의 경치를 사랑하여 대전리(大田里)의 집을 옮겨 횡계에 거처를 정하였습니다. 먼저 5곡의 와룡암 위에 집을 짓고 육유재(六有齋)라 하였습니다. 정규양 나이 40세 때 형 정만양이 가족을 이끌고 횡계로 찾아와 동생과 작은 집에서 함께 거처하면서 강론하였습니다. 두 형제는 간혹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낚시도 하며 즐겁게 살았습니다.
이들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였습니다. 그 심정의 일면을 문집에 수록된 시 '술회'(述懷)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술회(述懷) - 훈지양선생문집(塤篪兩先生文集)
세상 풍파를 알지 못하고 (世路風波也未知)
깊숙한 골짜기 한 곳에 우연히 깃드네 (一區林壑偶棲遲)
시냇가에 바위 있어 낚싯대 드리우고 (溪頭有石堪垂釣)
구름 밖 산이 많아 시를 읊조리네 (雲外多山詠詩)
때로 절의 누각에 이르니 승려 말이 부드럽고 (時到寺樓僧語軟)
매번 찻주전자 기울이니 병든 몸에 마땅하네 (每傾茶碗病軀宜)
날씨 개어 창가에서 많은 책 다시 대하니 (晴窓更對書千卷)
태고의 흉금은 복희에 있어라 (太古胸襟在伏羲)
- 모고헌
모고헌이 있는 이곳은 횡계구곡 가운데 3곡(曲)입니다. 이곳을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삼곡(三曲) - 훈지양선생문집(塤篪兩先生文集)
삼곡이라 깊은 제방 배를 띄울 만하고 (三曲深堤可汎船)
움집 중 태고와는 몇 년이나 되었는가 (窩中太古是何年)
진수재의 일은 모름지기 서로 힘쓰는 것이니 (進修一事須相勉)
다소의 영재를 나는 가장 아낀다네 (多少英才我最憐)
시에서 제방은 홍류담을 말하며, 홍류담 가에 세워진 정사가 태고와입니다. 이 시의 주석에 '제3곡은 태고와(太古窩)와 진수재(進修齋)가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지금은 상류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냇물이 많이 말랐지만, 예전에는 태고와 앞의 홍류담은 물의 깊이가 제법 깊어 배를 띄울 만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 두 사람은 이곳에서 배를 띄우기도 하였습니다.
8월에 작은 배가 비로소 이루어지니 대체로 서당 제군의 힘이다. 16일 밤에 산의 달이 매우 밝아 시험 삼아 제군과 더불어 배를 띄우고 홍류담에서 노닐며 뱃머리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니 생각이 초연하여 율시를 읊어서 제군에게 사례했다.
- 향나무
모고헌 바로 뒤쪽에 향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 향나무와 모고헌
고색창연한 모고헌과 향나무... 정만양과 정규양 두 형제처럼 아주 잘 어울립니다.
향나무는 자체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향나무를 어디에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 향나무
향나무 높이는 8m, 가슴높이 둘레는 3.3m 정도입니다.
- 향나무
모고헌은 뒷모습을 드러낼 뿐 앞모습은 감추고 있습니다.
모고헌의 멋을 제대로 느끼려면 앞모습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모고헌 앞쪽이 낭떠러지라서 모고헌의 앞모습을 보려면 제법 가파른 벼랑을 내려가 개천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게 생각만큼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모고헌 뒷모습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고헌에서 아쉬운 점입니다. 이 아쉬움을 달래주는 것... 바로 이 향나무입니다.
- 향나무
향나무 수령은 300여 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누각의 첫 건축 시기와 엇비슷합니다. 누각을 처음 지을 때 이 향나무도 같이 심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향나무는 보현산 정각사의 한 스님에게 얻어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시 '술회'(述懷)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때로 절의 누각에 이르니 승려 말이 부드럽고
매번 찻주전자 기울이니 병든 몸에 마땅하네
한가한 틈을 타서 절을 찾아가 가끔 담소하였던 시구(詩句) 속의 스님이 향나무를 준 바로 그 스님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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