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골 석조 약사여래좌상 찾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석조 약사여래좌상이 있어 절골 약사불절터는 덜 쓸쓸합니다. 이 석불은 마지막 축대 위의 약간 움푹 팬 땅 위에 앉아 있는데, 남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없고, 몸체만 남았습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리고 있으나, 손목 아래는 파손되었습니다. 그리고 왼손은 약사여래불답게 배 앞에서 약합을 받치고 있습니다. 크기는 높이가 124㎝, 무릎너비는 140㎝, 어깨너비가 103㎝입니다. - 절골 석조 약사여래좌상 비록 머리는 없어졌으나 목에 삼도가 뚜렷합니다. 그리고 목에는 지름 4㎝∙깊이 5㎝의 원형 구멍이 나 있습니다. 이 구멍은 석불의 머리를 따로 만들어 몸체에 고정했을 때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 절골..
- 절골 약사불절터의 첫 번째 축대 경주 남산 용장계곡의 열반골 입구에서 본류를 따라 770m 정도 들어가면 왼쪽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 골짜기 중간에 절터가 있어 절골이라 합니다. 골짜기의 길이는 약 300m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짧지만, 중턱에 꽤 큰 규모의 절터가 하나 있습니다. 약사불절터(절골 제1사지)라 부르는 이곳에는 축대와 함께 석조 약사여래좌상과 일부 탑재 등이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1925년에 석조 불두와 그리고 1940년에 석불 대좌 앞에서 소형의 금동여래입상이 수습되었습니다. 용장계곡 본류에서 100m 정도 들어가면 약사불절터의 첫 번째 축대가 나타납니다. 이 축대는 거의 허물어져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 석탑 하층기단부 첫 번째 축대를..
- 은적암터의 돌 축대경주 남산 용장계곡의 절골(寺谷) 입구에서 본류를 따라 약 200여m 정도 들어간 곳에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오른쪽으로 내를 건너 작은 숲길이 나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은적골(隱寂谷)이란 골짜기가 나타납니다. 이 골짜기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으로, 고위산 아래에서 시작하여 용장계곡에 합류하기까지 약 1㎞가량 이어집니다. 이곳은 동쪽으로는 태봉, 남쪽으로는 고위산, 서쪽으로는 이무기능선이 솟아 있어 상당히 깊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단종 때 생육신 가운데 한 명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숨어 살았다고 하는 은적암(隱寂庵)이 이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은적골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은적골에는 4곳의 절터가 있는데, 은..
- 사천왕사터 당간지주 천 년 신라 고도인 경주에는 한때 하늘의 별만큼 많은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많던 절은 사라지고 몇몇만이 남았습니다. 이러한 절과 절터를 나타내는 것들로는 탑이나 불상이 대표적이지만, 당간지주 역시도 이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경주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의 수는 얼마쯤 될까요?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보았는데, 생각만큼 많지 않습니다. 어디 한 번 살펴볼까요? 먼저 사천왕사터 당간지주입니다. 사천왕사는 문무왕 19년(679년)에 창건된 절입니다. 사천왕사터 당간지주도 그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 망덕사터 당간지주 망덕사는 신문왕 5년(685년)에 세워진 절입니다. 망덕사터 당간지주도 그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보..
- 금제 고배(金製 高盃), 5세기, 황남대총 출토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금제 고배(金製 高盃, 보물 제626호)입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그 형태만 본다면 이런 고배(굽다리 접시)는 다른 신라 고분에서도 다수 발견되었지만, 그것들은 토기였습니다. 이처럼 금으로 된 것은 없었지요. 다른 신라 고분에서 다수 발견된 토기 고배는 실생활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금제 고배는 실생활에서 사용하기에 너무 호사스럽지 않나요? 아마도 이것은 무덤 부장품으로 만든 것이었을 것입니다. - 금제 고배, 5세기, 황남대총 출토 이 고배는 아가리 부분은 밖으로 말아 붙였고, 나뭇잎 모양 장식 7개를 2개의 구멍을 통하여 금실로 꿰어 달아 장식성을 더했습니다. 접시를 받치고 있는 굽다리는 작은 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