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 실상사 극락전에 들어서기 전에 거북 머리를 한 귀부(龜趺)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비신은 어디에 잃어버리고 비머리만 등에 짊어진 채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귀부는 오랜 세월 탓에 닳고 닳아 지금은 희미하게 그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비머리 앞면에 새긴 글자는 지금도 읽을 수 있습니다. - 앞에 응료탑비가 있는 극락전 이 탑비는 증각대사에 대한 기록을 새긴 탑비로, 극락전으로 들어가는 문 바로 앞에 있습니다. 이 탑비는 탑비 뒤편에 있는 증각대사의 부도와 비슷한 시기에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 증각대사 응료탑비 증각대사 응료탑비에서 비신은 일찍이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받침돌인 귀부(龜趺)와 비머리인 이수(螭首)만 남아 있습니다. - ..
-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 실상사 극락전은 절의 중심 공간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덕분에 찾는 사람이 드문 편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실상사의 어느 곳보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 극락전 담 밖 한쪽에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인 홍척 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있습니다. 홍척(洪陟) 스님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살았으며, 시호는 '증각(證覺)'입니다. - 대석 땅에 넓은 네모꼴의 지대석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층단을 이루는 팔각의 2단 하대석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래쪽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위쪽에는 넓은 받침만 있을 뿐 달리 장식이 없습니다.하대석 위에는 높은 팔각의 중석(中石)받침이 따로 놓여 있는데, 모서리마다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습니..
- 실상사 철조 여래좌상 실상사 철조 여래좌상은 수철 스님이 4천 근이나 되는 철을 들여 만든 높이 2.7m의 거대한 불상입니다. 상체가 풍만한 이 불상은 두 발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꼿꼿하게 앉아 동남쪽인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리산 천왕봉은 일본 후지산과 정면으로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철조 여래좌상의 시선은 일본의 정기를 누르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광배는 없어졌으며, 불상은 대좌가 아닌 흙바닥에 앉아 있습니다. 대좌가 정유재란 때 실상사가 폐사될 당시에 파손된 것인지, 아니면 일본으로 흘러가는 땅의 기운을 막기 위해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일부러 맨땅에 세운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실상사 철조 여..
- 실상사 석등 실상사 경내로 들어서면 두 석탑 사이로 듬직하게 생긴 석등 하나가 서 있습니다. 실상사 창건 당시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석등은 그 높이가 5m나 됩니다. 대단한 크기라 할 수 있습니다. 실상사 석등은 전형적인 간주석 대신에 고복형(鼓腹形) 간주석을 지녔는데, 그 전체적인 형태가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이나 임실 용암리 석등과 비슷합니다. 아마도 당시에 이러한 형태가 이 지방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 실상사 석등 팔각형 지대석 위에 올린 하대석은 이중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아래쪽 각 면에는 안상무늬가, 위쪽에는 넓은 연꽃잎이 여덟 잎 새겨져 있습니다. 연꽃잎 끝에는 큼직한 귀꽃이 높직하게 솟아 있습니다.하대석 위에는 3단의 간주석받침이 있고, 그 위에 간주석이 놓여..
- 실상사 삼층석탑 실상사(實相寺)는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3년(828년)에 홍척대사(洪陟大師)가 창건하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제일 먼저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에 절을 세운 것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그때 실상사도 불타버려 폐사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이처럼 한때 폐사되다시피한 실상사가 중건된 때는 조선 숙종 16년(1690년)입니다. 이곳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서 있는 두 탑이 있습니다. 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 그리고 보존상태가 거의 같고, 특히 상륜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 서탑탑은 기단부 주위에 넓게 장대석을 둘러 탑구(塔區)를 설정하였습니다. 기단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