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옥천사터의 불대좌 하대석
창녕
화왕산 관룡사에서 800m쯤 아래로 내려간 길가에 옥천사터(玉泉寺址)로 알려진 절터가 있습니다.
이곳은 고려말 신돈(辛旽,
?~1371)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지금 이곳 절터에 들어서면 먼저 깨어진 불대좌 하대석 하나가 눈에 띕니다. 그 크기는 자그마한
편이며, 조각 솜씨는 단정합니다. 이 불대좌 위에 어떤 불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아름다운 불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 옥천사 절터와 석축
신돈은 조선시대에 요승(妖僧)으로 폄하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조선왕조의 성립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법명은 '두루 비춘다'는 뜻의 '편조(遍照)'인데,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 지금의 창녕) 옥천사 노비였다고 합니다. 신돈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열전'편에 "어머니가 천하므로 그 무리에 참여하지 못하고 늘 산방(山房)에 머물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후에 신돈은
공민왕의 돈독한 신임을 얻게 되었고, 이것을 발판 삼아 당시의 불합리한 사회제도 개혁에 나섰습니다.
그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두어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양민에게 돌려주었고, 강압으로 노비가 된 백성을 원래 신분으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귀족들의 모함을 지속해서 받게 되었고, 거기에다 공민왕 또한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그를
의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그는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제거되었는데, 이로써 그가 주도한 개혁작업도 끝나고
말았습니다.
- 석탑 지붕돌과 기단 면석
신돈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옥천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돈이 처형되자마자 절도 함께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절의 규모는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절터에는 석탑재 등이 흩어져 있습니다.
- 석탑 갑석
절터에 있는
석탑 갑석의 모습입니다. 비록 심하게 깨어졌지만, 2단 호각형 받침을 볼 수 있습니다.
- 석탑 지붕돌
석탑
지붕돌의 모습입니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게 없을 만큼 철저히 깨어졌습니다. 층급받침은 4단입니다.
절이 폐사된 지 이미 600년이 흘렀습니다. 절터는 숲으로 변했고, 그 한쪽에는 무덤이
자리하였습니다. 건물이 들어섰던 축대는 무너져 내렸고, 깨어진 석탑 부재만이
이곳저곳에 버려져 있습니다. 고려말 신돈이 꿈꾸었던 사회가 허망하게 사라졌던
것처럼 옥천사 또한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폐허로 변한 절터를 거닐며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신돈이 꿈꾸었던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요? 그리고
그 모든 게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런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산 보림사터 부도 (0) | 2013.11.07 |
---|---|
영산 법화암 다층석탑 (0) | 2013.11.06 |
경주 충효동 공개 석실고분 (0) | 2013.11.04 |
울산 선바위에 다시 들르다. (0) | 2013.11.01 |
고령 대평리 석불을 찾아서... (0) | 2013.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