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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현판전 포스터

 

대구박물관에서 2023년 11일 7일부터 2024년 2월 12일까지 조선시대 현판을 전시하는 '조선현판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 정도사지 오층석탑

 

조선현판전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에 박물관 앞뜰에 있는 석탑을 찾았습니다.

 

정도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이 석탑은 고려 현종 22년(1031년)에 세워졌습니다. 5층 지붕돌과 상륜부 일부가 없어졌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습니다.

이 석탑은 원래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정도사(淨兜寺) 터에 있었습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탑이 철도에 인접해 있어 해체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으로 옮겨졌으며, 1994년 대구박물관이 개관되면서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습니다.

 

- 매여동 삼층석탑

 

매여동 삼층석탑입니다.

 

이 석탑은 2006년 대구 동구 매여동(梅余洞)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1층과 2층은 4단이지만, 3층은 3단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초인 10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조선현판전 입구

 

조선현판전 전시실 입구입니다.

 

- 이광사가 쓴 오언시

 

조선현판전 전시실 안에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찾았습니다.

 

위 사진은 이광사가 행서로 쓴 오언시 글씨입니다. 빠른 붓 놀림과 글씨의 획에 깃든 힘으로 글씨가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시는 남송(南宋) 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산록(山麓)'입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이 우거진 산길은 실처럼 길게 이어졌는데   / 草合路如線
땔나무꾼을 따라나섰네   / 偶隧樵子行
산기슭 숲속에 넓은 바위가 있길래   / 林間遇磐石
잠깐 앉아 산 아래 들판에서 밭 가는 것을 바라본다   / 小憩看春畊

 

- 이광사와 이긍익이 쓴 묘지명 탁본집

 

이광사가 영조 52년(1776년) 병신년(丙申年)에 쓴 묘지명(墓誌銘)과 이긍익이 쓴 조선국 숙씨 묘지명(朝鮮國淑氏墓誌銘)의 탁본을 서첩으로 만든 탁본집입니다. 이 탁본집은 이광사와 이긍익의 글씨를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선국 숙씨 묘지명 글씨는 이긍익이 이광사의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썼습니다. 얼핏 보면 이광사의 글씨로 착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이광사의 장남입니다. 그는 조선시대 야사(野史)의 총서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썼습니다.

 

- 이광사가 쓴 연려실 글씨첩

 

이광사가 쓴 연려실 글씨첩입니다. 위 사진은 ' 연려실(燃藜室)' 중 '려실(藜室)'이라고 쓴 글씨입니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힙니다.

 

이광사는 왕실 종친의 후예로, 영조 즉위 후 가문이 역적 집안으로 몰리면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서예에 몰두하였습니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을 배웠고, 당대의 명필이었던 윤순(尹淳)에게 글씨를 배웠습니다. 그의 나이 51세 때인 영조 31년(1755년)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으로 백부 이진유가 처벌을 당할 때 이에 연좌되어 죽음의 문턱까지 갔습니다.

 

이 당시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문화 류씨(文化柳氏)가 절망하여 자결하였습니다. 그는 겨우 목숨만은 건지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도를 거쳐 신지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23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독창적인 글씨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하였습니다.

 

- 연려실 현판

 

연려실(燃藜室) 현판입니다.

 

'연려실'은 한나라 유향(劉向)이 옛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에 불을 붙여 비추어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연려실(燃藜室)' 글씨는 이광사가 그의 아들 이긍익의 서실 벽에 붙이라고 써준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의 서문 격에 해당하는 의례(義例)에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일찍이 유향(劉向)이 책을 교정할 적에 태을선인(太乙仙人)이 청려장(靑藜杖)에 불을 붙여 비춰주던 고사(故事)를 사모하였다. 그래서 선군(先君: 이광사)으로부터 '연려실(燃藜室)' 세 글자의 수필(手筆)을 받아 서실(書室)의 벽에 붙여두고 그것을 각판(刻板)하려다 미처 못하였다.

친구 간에 전하기를, "그 글씨가 선군(先君)이 남긴 글씨 중에서도 가장 잘된 글씨라 하여 서로 다투어 모사(模寫)하여 가서 각판을 한 이도 많았고, 그것으로 자신의 호로 삼은 이도 있다." 하니,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 책이 이루진 뒤에 드디어 <연려실기술>이라 이름 짓는다.

 

이긍익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연려실(燃藜室)' 세 글자를 자신의 호(號)로 삼았습니다. 평생을 고난 속에 산 부친을 그가 얼마나 흠모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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