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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천리 느티나무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梧川里)는 지정면 면사무소가 있는 봉곡리(鳳谷里) 동쪽에 있습니다. 오천리 마을은 오천(梧川), 웅곡(雄谷)이 있습니다. 

오천리는 옛 지산(芝山) 지역이며, 오동골, 온천, 온내, 오내라고 하기도 합니다. 갓등과 주개등이 동서북쪽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이 열려서 따뜻해 보이는 곳입니다. 임진왜란 후에 생긴 마을이라 하며, 옛날엔 골짜기 도랑 건너편에 오동나무 숲이 좋았고, 산자락 밭 언덕 같은 데도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 자란 여인이 시집갈 때 이 오동나무 두세 그루만 베면 좋은 장롱을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이곳은 오목한 지형인데 배수가 잘되어 오동나무가 잘 자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동나무 '오(梧)'자를 쓰는 '오천(梧川)'의 유래는 오동나무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어원적인 유래는 내 '천(川)'자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오천(梧川)의 의미를 '오동나무가 많은 마을'이 아니라 '내(川)가 있는 마을'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오천리 느티나무

 

웅곡(雄谷)은 면 소재지에서 약 5리 길입니다. 전래 지명은 쑷꿈, 숲골, 숫골, 숫뫼 등입니다. 마을은 골안과 새터 두 뜸인데, 양지바른 남향받이로 뒤로는 부드러운 산줄기가 감싸고 있습니다.

마을의 유래를 '숲골'로 보면 '숲이 울창한 골'의 뜻이며, '숫골'로 보면 '(암골에 비해) 수컷의 특징이 있는 골짜기'가 됩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확정하긴 어렵지만, 마을 뒷산 기슭에 있는 이운룡(李雲龍) 묘비에 이곳 지명을 웅산(雄山)으로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예전부터 '숫골'이라 불러왔던 전통이 있었음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오천리 느티나무

 

웅곡경로당 앞에 노거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 오천리 느티나무

 

한 그루는 웅곡경로당 앞 길가에 있습니다.

 

- 오천리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500여 년 오랜 세월의 흔적을 울퉁불퉁한 밑동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 오천리 느티나무

 

다른 한 그루는 개울가에 있습니다.

 

- 오천리 느티나무

 

이 느티나무는 밑동에서부터 여러 줄기가 한꺼번에 뻗어 나와 위로 자랐습니다.

 

- 오천리 느티나무

 

오천리 느티나무는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은 형제 나무입니다.

 

수령: 500년. 높이: 26m, 24m. 가슴높이 둘레: 8m, 7.4m
소재지: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610.

 

- 솟을삼문

 

웅곡 마을 뒤편에 기강서원(岐江書院)이 있습니다.

 

기강서원은 임진왜란 때에 무공을 세웠으며 후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낸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의 혼과 공훈(功勳)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과 후손들이 건립한 서원입니다.

 

- 기강서원

 

기강서원은 충양사(忠讓祠), 강당(講堂), 솟을삼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암(鼎巖)에서 흐르는 물과 낙동강 물이 합하는 기강(岐江) 유역에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 묘를 배경으로 웅곡(雄谷) 중앙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운룡의 묘는 원래 고향인 경북 청도군 법귀산에 안장되었으나, 인조 8년(1630년)에 그의 아들인 평택현감(平澤縣監) 이엄(儼)이 경남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로 이장하였습니다. 경남지역 유림에서는 그의 묘 앞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합의하고 정재(淨財)를 모아 1950년 4월에 먼저 통영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忠烈祠) 앞에 식성군 기적비(息城君紀蹟碑)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서원 건립은 한국전쟁으로 지연되었다가 1959년에 방후손(傍後孫) 이기환(李基煥)이 유림과 상의하여 식성군유적보존회를 결성하고 기강서원 건립에 착수하여 1965년에 사우(祠宇), 강당, 창고, 부속실, 정문 등 20여 간의 서원이 준공되었습니다.

 

- 기강서원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입니다.

 

- 충양사

 

충양사(忠讓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입니다.

 

- 이운룡 묘

 

이운룡 묘는 기강서원 뒷산 능선에 있습니다. 이곳에는 묘를 비롯하여 묘비, 상석과 향로석, 동자석 1조(2기), 망부석 1조(2기)가 있습니다.

 

봉분은 높이 3m 직경 6m 정도의 원분으로, 봉분의 아랫부분에는 치석한 석재를 가지런히 돌렸습니다. 아래에 받침이 되는 돌을 돌출되게 깔고, 그 위에 면석처럼 돌을 얹었습니다.

 

- 이운룡 묘

 

이운룡 묘는 구릉의 높은 쪽인 뒷면에는 돌을 돌리지 않고 꼬리가 길게 돌출한 것이 특징입니다.

 

봉분의 모습으로 보아 후대에 크게 수리하지 않은 듯한데, 둥글다기보다는 뾰족한 것처럼 처리된 것도 독특합니다.

 

- 이운룡 묘

 

이운룡(李雲龍)은 명종 17년(1562년)에 경북 청도에서 남해현령(南海縣令)을 지낸 이몽상(李夢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선조 25년(1592년)에 옥포만호로서 옥포대첩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선조 37년(1604년)에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습니다. 선조 38년(1605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광해군 2년(1610년)에 사망한 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습니다.

 

- 상석과 향로석

 

상석과 향로석입니다.

 

- 동자석과 망주석

 

동자석과 망주석입니다.

 

- 동자석

 

동자석은 80cm 내외의 높이로 낮은 편이며, 양쪽이 같은 문인석의 형태입니다. 얼굴을 제외한 전체 조각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 망주석

 

망주석(望柱石)입니다. 망주석은 묘가 있는 곳을 멀리서 바라볼 때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사용되었습니다.

 

- 세호

 

망주석에 꼬리가 긴 동물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동물을 세호(細虎)라고 합니다.

 

세호(細虎)는 한자의 뜻풀이대로 하면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는 호랑이 모습과 닮지 않았습니다. 세호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1752년)에서 인데, "세호를 조각하여 왼쪽의 망주에는 오르게 하고, 오른쪽 망주에는 내려가게 하였다"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세호는 시대가 내려오면서 장식화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꼬리가 긴 동물이 조각되었습니다.

 

- 묘비

 

묘비는 받침대를 갖추고 있으며 지붕은 없습니다. 묘비의 머리글로 '수군통제사식성군이공운룡지묘(水軍統制使息城君李公雲龍之墓)'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묘비의 글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짓고, 완산(完山) 김영(金榮)이 썼습니다. 비면이 마모되어 있으나 판독이 가능합니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식성군실기(息城君實記)>에 수록되어 있어 이운룡의 생애와 무공을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 이운룡 묘에서 바라본 전경

 

이운룡 묘에 올라서면 앞으로 시야가 트여 있습니다.

 

봉곡천과 그 앞으로 너른 들판이 있고, 그 앞을 나지막한 말두산이 막아주어 아늑함을 느끼게 합니다.

 

(202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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