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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림동 계곡의 정자
우리나라의 정자 문화의 메카라 불리는 함양 화림동 계곡(花林洞溪谷)... 이곳에 운치 있는 정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화림동 계곡을 흐르는 강은 금천(錦川)입니다. 금천은 남강(南江)의 상류입니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서상(西上)을 지나 서하(西下)에 이르면 기이한 바위와 물웅덩이를 만들고, 안의(安義)에 이르러서는 너럭바위 위로 흐르는 계곡물과 주위 소나무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이룹니다.
- 거연정
봉전마을 옆 금천 한가운데 바위 위에 거연정(居然亭)이 있습니다.
- 거연정
거연정은 고려 말 전오륜(全五倫)의 7대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전시서(全時敍)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지은 정자입니다.
전시서는 인조 18년(1640년)에 전오륜을 제향한 서산서원(西山書院)을 세우고, 지금 거연정이 있는 곳에 억새로 만든 누정(樓亭)을 지었습니다. 고종 5년(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 자체가 훼철되자 고종 9년(1872년)에 전시서의 7대손 전재학(全在學) 등이 억새로 된 누정을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새로 지었습니다.
- 거연정
거연정으로 가려면 무지개다리인 화림교(花林橋)를 건너야 합니다. 화림교에서 내려다보는 검푸른 물웅덩이와 기암괴석은 정자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 군자정
거연정에서 남천을 따라 150m쯤 내려오면 군자정(君子亭)이 있습니다.
군자정이 있는 봉전마을은 조선 성종 때의 성리학자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처가가 있는 마을입니다. 정여창이 처가에 들러 머물 때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詠歸臺)에 올라 쉬었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순조 2년(1802년)에 전시서의 5대손인 전세걸(全世杰)과 전세택(全世澤)이 정여창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군자가 머물던 곳이란 뜻으로 군자정이라 하였습니다.
- 동호정
군자정에서 남천을 따라 1.5km쯤 내려오면 넓게 펼쳐진 바위섬인 차일암(遮日巖)이 있습니다.
이곳은 넓고 평편하며, 바위 곳곳에 금적암(琴笛岩), 영가대(詠歌臺)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도 음주가무(飮酒歌舞) 무대로서 제 역할을 십분 발휘하여 만인의 사랑을 받아왔을 것 같습니다.
- 동호정
차일암이 내려다보이는 금천 가에 동호정(東湖亭)이 있습니다.
- 동호정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義州蒙塵)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 겸 오위장(嘉善大夫兼五衛將)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0년경에 지은 정자입니다.
- 농월정
동호정에서 남천을 따라 3.5km쯤 내려오면 농월정(弄月亭)이 있습니다.
농월정은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한다'는 뜻입니다. 정자 앞은 너럭바위들이 가득하고, 너럭바위 위나 옆으로 쉴 새 없이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립니다.
- 농월정
농월정은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인 박명부(朴明傅)가 병자호란 때 굴욕적인 강화조약이 맺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입니다.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 1571∼1639)는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가 파직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 생활을 하면서 이곳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심신을 수련하였습니다. 그 후 인조반정 후 예조참판과 강릉 도호부사 등을 지냈고, 병자호란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인조 15년(1637년)에 농월정을 짓고 말년을 보냈습니다.
농월정은 몇 차례 중건을 거쳐 1899년에 완성됐습니다. 그러나 2003년 10월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하여 2015년에 함양군에서 기록사진과 도면 등을 바탕으로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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