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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진해 웅천읍성

sky_lover_ 2012. 4. 9. 06:39

- 동문루인 견룡문

웅천은 조선 시대 삼포 가운데 하나인 제포가 있었던 곳입니다.

삼포(三浦)란
조선시대에 일본인들의 왕래와 거주를 허가하였던, 남해안과 동해안의 세 포구를 말합니다. 즉 부산포(釜山浦, 또는 富山浦), 염포(鹽浦, 현재 울산시 현대자동차공장자리), 제포(薺浦, 진해 제덕동 포구)를 말합니다. 그러나 중종 5년(1510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모두 폐쇄되었다가, 2년 후에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면서 제포만 다시 개항되었습니다.

당시 제포에는 제포성이 있었고, 제포성 바로 북쪽에 있는 웅천진에는 웅천읍성이 있었습니다. 제포성웅천읍성은 일본과의 외교 창구 역할과 함께 왜구 방어의 최일선 기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 동쪽 성문이 있는 옹성 내에서 바라본 성벽

제포가 일본에 개항된 것은 조선 태종 7년(1407년) 일본과의 선린 정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개항 후 이곳에 일본인 거주자가 많아졌고, 그러자
세종 19년(1437년)에 읍민을 보호하기 위해 웅천읍성을 쌓았습니다. 성의 둘레는 약 1km, 높이 4.5m였다고 합니다.

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
습니다. 동문인 견룡문(見龍門), 서문인 수호문(睡虎門), 남문인 진남문(鎭南門), 북문인 공신문(拱宸門)이 그것입니다. 이들 성문에는 문루를 두어, 성 내외의 출입을 통제하였고, 전투 시에는 장수의 지휘소로 이용하였습니다.

- 읍성 내 마을 모습

웅천읍성은 일제강점기 때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이 망하면서 읍성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이곳에 도로와 집들이 들어서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 웅천읍성의 동쪽 성벽

웅천읍성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비록 일부이지만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동쪽 성벽과 동문루, 그리고 동쪽 성벽 쪽 해자 등이 복원되었습니다. 전체적인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복원된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 동쪽 성벽을 따라 설치된 해자

동쪽 성벽을 따라 길게 해자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해자(垓子)란 성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 하천 등을 이용하여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을 말합니다. 웅천읍성에선 길이 300m의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 해자가 확인되었습니다.

- 해자를 건널 때 쓰인 조교

동문 옆 해자에 특이하게 생긴 널다리가 하나 걸쳐져 있습니다.

조교(釣橋)
라고 하는 다리입니다. 이 널다리는 해자를 건널 때 사용되었는데, 양쪽에 쇠줄을 걸어 놓아 이것을 이용하여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였습니다.

- 동쪽 성벽의 안쪽 모습

성벽 안쪽을 살펴보면, 흙을 다져 비스듬히 쌓아올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을 쌓아올린, 이런 축성 방식을 내탁공법(內托工法)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널리 사용된 축성 방식이라고 합니다.


웅천읍성과 같이 훼손된 옛 성곽을 복원하는 것은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잊혀온 역사적 끈을 다시 이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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