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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소대
여수(麗水)는 조선 성종 10년(1479년)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 폐영될 때까지 400여 년간 조선 수군의 본거지였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의 정전 기간에 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게 되면서 여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 진남관(鎭南館) 맞은편 언덕에 있는 고소대(姑蘇臺)에 충무공 이순신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 고소대
고소대는 전라좌수영 성체의 치성(雉城) 위에 세운 포루로, 장대(將臺)로 사용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수 8경의 하나이기도 하고, 옛날에는 고소정(姑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곳에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와 타루비(墮淚碑)를 안치하기 위해 1947년에 세워진 비각이 있습니다. 비각 옆 뜰에는 수령 300여 년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는 충무공 이순신의 전승을 기념하여 세운 우리나라 최대의 대첩비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 봄에 여수경찰서장 마쓰키(松木)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비각을 헐고 대첩비와 타루비를 반출하여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광복 후 해남지역 유지들이 수소문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서 찾아내어 지금 자리로 옮겨왔습니다.
- 통제이공수군대첩비
비는 충무공 이순신의 부하로 있다가 전라좌수사와 황해병사를 지낸 유형(柳珩)이 돌을 보내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쓰고, 이항복(李恒福)이 비문을 지었으며, 김현성(金玄成)이 비문을 새겼습니다.
- 부분
비문 끝부분에 '만력사십삼년오월(萬曆四十三年五月)'이란 글자가 있어 광해군 7년(1615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타루비
타루비(墮淚碑) 충무공 이순신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입니다.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襄陽)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성어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비는 네모난 비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습니다.
비문은 '타루비'(墮淚碑)라는 비의 명칭을 앞면에 크게 새기고, 그 아래로 명칭을 붙이게 된 연유와 비를 세운 시기 등을 적었습니다. 비는 충무공 이순신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년)에 세워졌습니다.
- 비좌
비좌는 장방형(長方形)입니다. 앞면에 네모꼴로 얕은 홈을 파고, 그 안에 꽃과 줄기 무늬를 새겨 장식하였습니다.
- 비좌 옆면
비좌 옆면에 여의두문(如意頭文)이, 윗면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 비신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하수졸위통제사 이공순신입단갈명왈타루 개취양양인사양우이망기비즉루필타자야 만력삼십일년추립(營下水卒爲統制使 李公舜臣立短碣名曰墮淚 蓋取襄陽人思羊祜而望其碑則淚必墮者也 萬歷三十一年秋立)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은 타루이다. 중국의 양양 사람들은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만력(萬歷) 31년(1603년) 가을에 세우다.
- 이수
이수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고, 꼭대기에 연꽃봉오리가 큼직하게 솟아 있습니다.
- 타루비 뒷면
비의 뒷면 모습입니다.
- 망해루
진남관 정면에 있는 망해루(望海樓)입니다. 건물은 2층 누각으로,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에 복원하였습니다.
진남관은 지금 보수공사 중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냥 발길을 돌리기 아쉬워 주위를 둘러보니 비(碑)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좌수영비군(左水營碑群)입니다. 꿩 대신 닭이라도 보게 되어 다행입니다.
- 이량장군방왜축제비
이곳 비들 가운데 이량장군방왜축제비(李良將軍防倭築堤碑)입니다.
비의 몸돌에 '이장군함천군휘량방왜축제비'(李將軍咸川君諱良防倭築堤碑)라고 큰 글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는 연산군 3년(1497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온 이량(李良)이 돌산도 북쪽과 장군도 동쪽 사이 해협에 수중(水中) 제방을 쌓아 왜구들의 침입을 막은 것을 기념하여 후손들이 세웠습니다.
원래 인조 21년(1643년) 그의 5세손 이배원(李培元)이 글을 짓고 6세손 이필(李泌)이 글씨를 써 장군도에 세웠으나, 비가 훼손되자 숙종 36년(1710년) 8세손 이삼(李森)이 좌수영성 서문 밖(충무동)에 다시 세웠는데, 이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습니다.
- 철비1
이곳에 철비 3기가 있습니다.
철비1은 절도사 조문현의 선정비입니다. 비신에 '절도사조공문현청덕선정비'(節度使趙公文顯淸德善政碑)란 비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고종 9년(1872년)에 세워졌습니다.
- 철비2
철비2는 돌산군수 조동훈의 영세불망비입니다. 비신에 '행군수조공동훈영세불망비'(行郡守趙公東勳永世不忘碑)란 비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고종 광무 2년(1898년)에 세워졌습니다.
- 철비3
철비3는 전라좌수사 유광로의 선정비입니다. 비신에 '수사유공광로청덕선정비'(水使柳公光魯淸德善政碑)란 비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철종 5년(1854년)에 세워졌습니다.
- 구 제일은행 여수 지점
진남관 남쪽에 구 제일은행 여수 지점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로, 일제강점기 말까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여수 지점이었습니다.
조선식산은행은 해방 후 한국식산은행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1954년에 한국저축은행이 한국식산은행의 건물과 직원을 승계하여 한국산업은행으로 발전하였으며, 이어서 1958년에 산업은행 일부를 제일은행으로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이 건물은 제일은행 여수 지점이 되었습니다.
건물은 2층 벽돌 건물이고, 외벽은 시멘트 모르타르 테라조 마감입니다. 지붕은 목조 트러스에 슬레이트 잇기를 하였고, 외부의 벽면은 창에 의해 수직으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정면에 상하로 긴 창 다섯 개를 좌우 대칭으로 배열하였고, 그 양쪽에 다시 수직 방향으로 긴 창을 하나씩 두었습니다.
- 구 제일은행 여수 지점
건물 정문 위쪽 벽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이란 글자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이 일제강점기의 건물임을 나타냅니다.
왜군에 맞서 목숨을 바쳐 싸워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의 수군대첩비와 타루비가 있는 이곳에서 일제강점기의 조선식산은행 건물을 마주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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