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침간정(枕澗亭), 전(傳)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조선 18세기 후반, 48.4 x 113.0 x 6.0cm,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초서체로 '침간정(枕澗亭)'이라고 쓴 현판입니다. 이 현판은 침간정(枕澗亭)의 현판입니다. 침간정은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이 안동(安東) 박실(瓢谷, 朴谷)에 거주할 때 수양과 강학을 목적으로 지은 정자입니다. '침간정(枕澗亭)'은 '산골 물을 베개 삼아 살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서예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용와종택 사랑채와 현판 (사진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구미시(龜尾市) 해평면(海平面) 일선리(一善里)에 용와종택(慵窩宗宅)이 있습니다. 용와종택은..

- 만귀정 (사진 출처: 성주군청) 경북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에 포천(布川)계곡이 있습니다. 포천계곡은 짙푸른 물과 바위가 마치 베(布)를 널어놓은 것 같다 하여 그렇게 부릅니다. 이곳에 만귀정(晩歸亭)이 있습니다. 만귀정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노년에 지은 정자입니다. 이원조(李源祚, 1792~1872)는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입니다. 그는 성주 한개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순조 9년(180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헌종 3년(1837년)에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흉년으로 인한 민생의 어려움과 사족(士族)들의 사치함을 들어 쇄신책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철종 원년(1850년)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올랐으나, 경상좌도 암행어사 김세호(金世鎬)의 탄..

- 정지재(定止齋), 작자 미상, 조선 후기, 51.4 x 114.2 x 11.0cm,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살집 두툼한 글씨를 해서체로 쓴 안동(安東) 정지재(定止齋) 현판입니다. 정지재 주인 김확(金確, 1583~1665)은 조선 중기 학자로,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이실(而實)이며, 호는 정지재(定止齋)입니다. 구봉(九峰) 김전(金㙉, 1538~1575)의 손자입니다. 그는 일찍 생원시에 합격하여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안(禮安)에 살았는데, 인조 14년(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1646)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미 조정이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고향으로 돌아..

- 옥천종택 (사진 출처: 영양군청)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한양조씨(漢陽趙氏)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이 17세기 말에 지은 고택이 있습니다. 옥천종택(玉川宗宅)입니다. 옥천종택은 살림채인 정침(正寢), 글 읽는 별당인 초당(草堂), 가묘인 사당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침은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연결된 'ㅁ'자형을 하고 있습니다. 별채는 초당(草堂)이라고 하며, 초가지붕을 하였습니다. 사당은 정침 뒤쪽에 있습니다. 이 고택은 조덕린의 아들 조희당(趙喜堂)을 비롯하여 조희당의 아들 조운도(趙運道), 조술도(趙述道), 조진도(趙進道), 그리고 조진도의 아들 조거신(趙居信) 등 조선의 쟁쟁한 학자들이 태어난 곳입니다. - 옥천종택의 살림채 (사진 출처: 영양군청) 조덕린(趙德鄰, ..

- 오헌(吾軒), 박규수(朴珪壽, 1807~1877), 조선 1875년, 56 x 131x 7cm,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해서체로 '오헌(吾軒)'이라 쓴 현판입니다. 이 현판은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에 있는 반남박씨(潘南朴氏) 오헌(吾軒) 박제연(朴薺淵)의 고택(古宅) 당호(堂號) 현판입니다. 오헌(吾軒)은 '나의 집'을 뜻합니다. 현판 글씨는 고종 12년(1875년)에 당대 최고의 개화사상가인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가 썼습니다. 환재 박규수는 큰 글씨로 '오헌(吾軒)'이라 쓴 후 남은 여백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뭇 새들도 깃들일 곳이 있어 즐겁듯이 / 衆鳥欣有托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 / 吾亦愛吾廬 이는 도연명이 마음으로 / 此爲陶令襟期 사물과 내가 즐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