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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간정(枕澗亭), 전(傳)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조선 18세기 후반, 48.4 x 113.0 x 6.0cm,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초서체로 '침간정(枕澗亭)'이라고 쓴 현판입니다. 이 현판은 침간정(枕澗亭)의 현판입니다.
침간정은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이 안동(安東) 박실(瓢谷, 朴谷)에 거주할 때 수양과 강학을 목적으로 지은 정자입니다. '침간정(枕澗亭)'은 '산골 물을 베개 삼아 살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서예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용와종택 사랑채와 현판 (사진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구미시(龜尾市) 해평면(海平面) 일선리(一善里)에 용와종택(慵窩宗宅)이 있습니다. 용와종택은 영조 때 공조참의를 지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이 지은 살림집입니다. 원래는 안동시(安東市) 임동면(臨東面) 박곡리(朴谷里)에 있었는데, 1987년에 임하댐 건설에 따라 이곳에 옮겨졌습니다.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1680~1746)은 숙종 45년(1719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내직으로 예조정랑과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종성부사, 함안군수, 영해부사, 풍기군수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네 개 고을 수령에서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45세 무렵에 홀연히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박실(瓢谷, 朴谷)로 내려와서 작은 집을 짓고 '용와(慵窩)'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게으른 늙은이라고 '용수(慵叟)'라고 자칭을 하였습니다.
그는 <용와음(慵窩吟)>이라는 시를 지어 감실 같은 작은 집을 지어 놓고 게으른 본성을 기르며 두보와 소동파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용와음(慵窩吟) - 류승현(柳升鉉)
감실 같은 집 지으니 게으름만 늘고 / 築屋如龕爲養慵
베갯머리 산골 물은 졸졸 흐르네 / 枕邊鳴澗玉琤琮
두로(杜老)의 동쪽 대숲1)을 새로 옮기고 / 新移杜老東林竹
파공(坡公)의 백학봉(白鶴峯)2)은 이미 사 두었네 / 已買坡公白鶴峯
소리 그윽한 창가에는 골짜기 새가 날아오고 / 幽響近囱來谷鳥
녹음 짙은 난간에는 바위 소나무가 드리웠네 / 濃陰滴檻倒巖松
주1) 두로(杜老)의 동쪽 대숲: 두보(杜甫)의 시 <아우 점이 초당을 살피러 돌아가므로 이 시를 보이다(舍弟占歸草堂檢校 聊示此詩)>에 "동쪽 대나무 그림자가 엷으니, 섣달에 또 대나무를 심어야겠네."라고 하였다. 두로는 두보를 말하는데, 장안(長安) 교외에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두릉(杜陵)의 포의(布衣), 소릉(小陵)의 야로(野老)라고 하였다.
주2) 파공(坡公)의 백학봉(白鶴峯): 파공은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말하며, 백학봉은 소식이 집을 지은 곳이다. 소식이 혜주(惠州)에 있으면서 백학봉 아래에 새집을 완성하고 지은 시가 있다.
용와종택 사랑채에 '용와(慵窩)'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현판 글씨는 18세기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원교체(圓嶠體)로 유명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썼습니다.
- 침간정과 현판 (사진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침간정(枕澗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입니다.
용와 류승현이 자신이 살던 박실(瓢谷, 朴谷)에 단애침류(斷崖枕流)를 감상하려고 정자를 지었습니다. 이 정자가 침간정(枕澗亭)입니다. 그러나 30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침간정은 박실(瓢谷, 朴谷)을 떠나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낯선 타향 땅 한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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