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양동 삼층석탑 경북 청도군 풍각면(豊角面)은 청도에서 가장 서쪽에 있습니다. 동쪽으로만 평지로 뚫려 있을 뿐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남서쪽으로 창녕 고암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버티재와 방골재란 험한 고갯길을 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산만 있고 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풍각 일대는 그런대로 너른 들이 있습니다. '풍각'(豊角)이란 지명도 '소뿔 사이의 넓은 곳'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풍각 덕양리(德陽里)도 너른 들이 있습니다. 이곳은 햇빛을 잘 받는 곳이라 하여 양촌(陽村)이라 하였는데, 햇빛을 더 많이 받아야 부촌이 된다고 하여 가양(加陽)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 덕양동 삼층석탑 덕양마을 입구에 당산나무가 있습니다. 그 옆에 덕양동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 오층석탑 만복사지를 세 지역으로 나누었을 때, 서쪽 지역에 석인상과 석조대좌(서금당지)가, 가운데 지역에 당간지주, 목탑지, 북금당지가, 동쪽 지역에 동금당지, 오층석탑, 석불입상이 있습니다. 오층석탑은 동금당지와 석불입상 보호각 사이에 있습니다. 탑은 절이 창건된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오층석탑 탑의 높이는 5.75m입니다. 지대석 위에 단층 기단부가, 그 위에 5층 탑신부가 놓여 있습니다. 탑신부보다 기단부가 왜소합니다. 탑신부는 1층 몸돌이 특히 높고, 2층 몸돌부터 1층 몸돌 크기의 1/3로 줄었습니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평박하며, 추녀 끝이 약간 들려 있습니다. 2층부터 별개의 받침돌이 몸돌과 지붕돌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런 형태는 고려 시대 석탑에서 가끔 볼 수 있습니다...
- 용담사 남원(南原) 원천천(元川川)이 요천(蓼川)으로 흘러들기 전에 한 번 크게 굽이쳐 흘러갑니다. 그곳에 용담사(龍潭寺)가 있습니다.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설이나 유물로 보아 신라 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절이 세워지기 이전에 부근의 용담천 깊은 물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면서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에 신라 말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절을 짓고 용담사라 한 뒤부터 이무기의 행패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고려 때 중창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 정유재란 때 스러진 뒤 사세를 펴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칠층석탑 경내로 들어서면 칠층석탑이 제일 먼저 맞습니다. 탑은 높이가 10m쯤 됩니다. 너무 길쭉하고 ..
- 금둔사지 삼층석탑 금둔사지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부를 올린 통일신라 시대의 탑입니다. - 금둔사지 삼층석탑 탑에는 상층기단 각 면에 팔부중상(八部衆像) 2구씩 모두 8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탑신부의 1층 몸돌 앞면과 뒷면에 문비 장식과 양 옆면에 공양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 공양상 공양상은 연화좌(蓮花座) 위에서 한쪽 무릎을 세워 꿇어앉아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받들고 있습니다. - 공양상 다른 면의 공양상입니다. 두 공양상은 모두 석불비상(石佛碑像)을 향하고 있습니다. - 팔부중상 팔부중상입니다. 팔부중상은 모두 갑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 팔부중상 - 팔부중상 - 팔부중상 - 팔부중상 - 팔부중상 - 팔부중상 - 팔부중상
- 계산리 삼층석탑 계산리 삼층석탑(桂山里 三層石塔)은 처음 찾아가는 사람에게는 찾아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탑은 계동(桂洞) 마을회관을 지나 탑생이골 안쪽에 있습니다. 큰 도로 입구에 안내판 하나만 덜렁 있을 뿐 마을에서 탑까지 안내 표시가 전혀 없습니다. 알고 찾아가는 경우가 아니면 헤매기에 십상입니다. - 계산리 삼층석탑 우리나라 마을 어디든 나름대로 사연들이 있겠지만, 이곳 계동(桂洞)마을도 사연이 좀 있습니다. 1680년경에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마을의 이름은 뒷산에 장등(긴등)이 있다 하여 장동이라 불렸는데, 폭우로 인해 매몰된 뒤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부락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때 부락명을 계동이라 하였습니다. 1947년 여순반란 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