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 굴산사터 부도와 절터 굴산사(崛山寺)는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가 신라 문성왕 9년(847년)에 창건한 절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본산이었습니다. 절의 창건과 관련해서 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범일이 당나라에서 유학 생활을 할 당시에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왼쪽 귀가 떨어진 한 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이 말하기를 "저도 역시 고향 사람입니다. 집은 명주(溟州, 강원도 강릉 일대) 부근 익령현(翼嶺縣, 강원도 양양군 일대) 덕기방(德耆坊)에 있사오니, 조사께서 훗날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꼭 저의 집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귀국 후 범일국사는 그 스님의 뜻에 따라 사굴산 아래에 굴산사를 창건하였다. 당시 굴산사는 강릉 일대에서 가장 큰 절이었고,..
- 양양 선림원터 부도 선림원터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기단부만 덩그러니 남은 부도가 하나 있습니다. 이 부도는 원래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두고, 그 위에 탑신부·상륜부를 차례로 놓았던 것인데, 지금은 탑신부·상륜부는 없어지고 기단부만 남았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만 해도 1.2m이니 원래 크기는 상당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재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습니다. 원래 위치는 뒷산 중턱으로 50m쯤 올라간 곳이라고 합니다. 부도가 만들어진 시기는 이곳에 남아 있는 홍각선사 탑비(弘覺禪師塔碑)와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신라 정강왕 원년(886년)으로 추정됩니다. - 세부 부도의 맨 아랫부분을 보면 네모난 지대석과 팔각형의 ..
- 작은 늠비절터의 사리탑 큰 늠비절터에서 늠비봉 오층석탑이 서 있는 쪽으로 내려오면, 부흥사로 내려가는 길과 늠비봉 오층석탑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부흥사 쪽으로 내려가는 길과는 반대쪽으로 작은 오솔길이 하나 나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사리탑 하나가 길가에 넘어진 채 있습니다. 이곳은 늠비봉 오층석탑이 있는 곳(작은 늠비절터)에서 동남쪽으로 약 65m 떨어진 곳입니다. - 사리탑 사리탑은 받침돌과, 그리고 지붕돌과 하나로 된 몸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리탑이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옮겨가려다 이곳에 놓아둔 것이라고 합니다. - 사리탑 도면 받침돌은 네모꼴로, 1단 받침이 있습..
-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실상사 극락전을 향한 그 오른쪽에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이 있습니다. 이 부도는 실상사의 제2조사(第二祖師)인 수철화상의 부도로, 높이가 2.42m입니다. 수철화상(秀澈和尙)은 신라 후기의 스님으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 번 째 창건주가 되었습니다. 진성여왕 7년(893년)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秀澈)'이라 하고, 탑호를 '능가보월(楞伽寶月)'이라 하였습니다. -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부도는 통일신라시대 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높직한 팔각지대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대석은 팔각형으로, 1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모가 심해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희미하게나마 ..
-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 실상사 극락전은 절의 중심 공간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덕분에 찾는 사람이 드문 편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실상사의 어느 곳보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 극락전 담 밖 한쪽에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인 홍척 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있습니다. 홍척(洪陟) 스님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살았으며, 시호는 '증각(證覺)'입니다. - 대석 땅에 넓은 네모꼴의 지대석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층단을 이루는 팔각의 2단 하대석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래쪽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위쪽에는 넓은 받침만 있을 뿐 달리 장식이 없습니다.하대석 위에는 높은 팔각의 중석(中石)받침이 따로 놓여 있는데, 모서리마다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