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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의 고택

sky_lover_ 2024. 2. 23. 07:03

- 근암고택 앞에서 바라본 양동마을

 

경주 양동(良洞)마을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이른바 '물(勿)' 자 형국의 명당 터에 있습니다.

 

'물(勿)' 자 형국의 양동마을 안쪽 언덕 위에 근암고택(謹庵古宅)이 있습니다. 이곳은 양동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입니다.

 

- 근암고택 사랑채

 

근암고택은 태로(台老) 이정수(李鼎壽, 1758~1784)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 이 씨가 언덕 아래 평지에 지었던 집입니다.

 

1880년대에 그의 현손(玄孫)인 근암(謹庵) 이희구(李熙久, 1858~1901)가 옛집을 뜯어서 지금 자리에 옮겨 지으면서 규모를 늘려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집의 이름이 근암고택이 되었습니다.

근암고택은 '一' 자형 문간채가 있고, 그 안쪽에 'ㄱ' 자형 안채와 '一' 자형 사랑채가 있습니다. 사랑채는 1칸 방 2개와 1칸 대청을 두었고,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습니다.

 

사랑채가 마을의 여느 집들과 달리 안채 담장 밖에 따로 있습니다. 원래 안채와 직각으로 놓여 있던 사랑채가 소실되어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 상춘헌 고택

 

근암고택 바로 옆에 상춘헌 고택이 있습니다. 

 

이 고택은 동고(東皐) 이덕록(李德祿, 1677∼?)이 영조 6년(1730년)경에 지었다고 하며, 그의 후손인 상춘헌(賞春軒) 이석찬(李錫贊, 1897~1963)호를 따라 상춘헌 고택이라 하였습니다.

상춘헌 고택은 양동마을에서 일반적인 'ㅁ' 자형 평면을 가진 집입니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되어 있는데, 'ㄷ' 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ㅡ' 자형의 행랑채로 되어 있습니다.

 

- 현판

 

사랑채에 '상춘헌(賞春軒)'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상춘(賞春)'은 봄을 감상하는 것, 즉 봄의 경치를 보고 즐긴다는 뜻입니다.

 

- 사랑채

 

사랑채에는 방과 대청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 사랑채 기단에 화단을 꾸몄습니다. 사랑채와 화단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상춘헌(賞春軒)이라는 집 이름과 잘 어울립니다.

 

- 회화나무

 

상춘헌 고택 옆에 사호당 고택이 있습니다.

 

사호당 고택 앞 길가에 노거수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 사호당 고택

 

사호당 고택은 진사(進士)를 지낸 이재로(李在老, 1803~1879)가 헌종 6년(1840년)에 지어 살던 곳으로, 아들인 사호당(沙湖堂) 이능승(李能升, 1827~1881)의 호를 따라 사호당이라 하였습니다.

 

사호당 고택은 주로 'ㅁ' 자 모양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의 다른 집들에 비해, 'ㄱ' 자형의 안채에 'ㄱ' 자형의 사랑채가 잇대어져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닿아 있는 부분에 곳간방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문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커다란 항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독을 먼저 넣고 집을 지은 것을 말하는데, 곡식이 돈과도 같았던 시기에 안주인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 현판

 

사랑채 대청 벽에 '사호당(沙湖堂)'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수졸당

 

무첨당 뒤편 언덕에 수졸당(守拙堂)이 있습니다.

 

수졸당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넷째 손자인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 1576~1635)이 분가하여 지은 집으로, 그의 호를 따라 수졸당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정조 때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을 지낸 양한당(養閒堂) 이정규(李鼎揆, 1735~1810)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수졸당은 'ㄱ' 자형 안채, 'ㅡ' 자형 아래채, 'ㅡ' 자형 사랑채와 대문채가 'ㅁ' 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뒤편에 사당이 있습니다. 사랑채는 정면 4칸으로, 좌측 2칸은 대청이고, 우측 2칸은 온돌방입니다. 사랑채 앞에는 반 칸 정도 툇마루를 두었습니다. 대문채에도 작은 사랑방을 두었습니다.

 

수졸당은 17세기 초 광해군 때 처음 지어졌으며, 18세기 영조 때 사랑채를 늘려서 지어졌습니다. 대문채는 사랑채보다 지붕을 낮게 하여 건물의 격식 차이를 보여줍니다.

 

- 수졸당

 

수졸(守拙)은 사전적 의미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수졸당(守拙堂)에서 '수졸(守拙)'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에서의 '수졸(守拙)'은 어리석음(우직함, 잔머리를 안 굴리는 것), 못남(잘난 것의 반대말)을 적극적으로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노자적(老子的) 우직(愚直)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연명(陶淵明)의 시 '귀원전거(歸園田居)' 중에 "서툰 분수를 지켜 시골로 돌아왔네(守拙歸田)"라고 하였습니다.

 

- 육위정

 

물봉골 무첨당 뒤쪽에 육위정(六韡亭)이 있습니다.

 

육위정은 선조 24년(1591년)에 지어진 건물로, 회재 이언적의 넷째 손자인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이 분가한 집이었다고 합니다.

 

이의잠이 따로 옮겨간 후 자손들이 사가로 사용하다가 6형제가 태어났고, 자손들이 번성하라는 뜻에서 '육위정(六韡亭)'이라 하였습니다. 지금은 문중에서 정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현판

 

대청 벽에 '육위정(六韡亭)'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육위정의 '위(韡)'는 <시경(詩經)> 상체(常棣)의 "상체의 꽃이여, 드러나게 활짝 피었지 않은가. 무릇 지금 사람들은 형제 같은 이 없느니라"(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에서 유래합니다. '육위(六韡)'는 이의잠의 10대 손자들인 정구, 임구, 동구, 체구, 송구, 희구를 말합니다.

 

- 이호문

 

물봉골 서쪽 언덕에 영귀정(詠歸亭)이 있습니다.

 

영귀정은 회재 이언적이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모옥(茅屋)이 있던 곳에 후손들이 중건한 정자입니다. 영귀정의 솟을대문은 이호문(二乎門)입니다. '이호(二乎)'는 '손님이 두 번은 불러야 나온다'는 뜻입니다.

 

영귀정 명칭은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증점(曾點)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한데서 유래합니다.

 

- 영귀정

 

영귀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입니다.

 

좌측 2칸은 대청, 우측 1칸은 온돌방입니다. 앞면에 구한말 이후 유행하였던 난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설천정사

 

물봉동산 서쪽 기슭 숲속에 설천정사(雪川精舍)가 있습니다. 정사(精舍)는 학문을 하면서 정신을 수양하는 곳을 말합니다.

 

설천정사는 선조 35년(1602년)에 회재 이언적의 셋째 손자인 설천(雪川) 이의활(李宜活, 1573~1627)이 학문을 강학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집으로, 2칸 대청과 1칸 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202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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