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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산도

 

진해 용원(龍院) 앞바다와 용원에 김해 가락국(駕洛國) 허황후(許皇后)와 관련된 유적지가 있습니다. 용원 앞바다의 망산도(望山島)와 유주암(維舟岩), 그리고 용원의 유주비각(維舟碑閣)이 그곳입니다. 모두 고대 가락국의 수로왕비(首露王妃) 허황후의 전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경남 지역, 특히 김해 부근에 사는 사람이면 허황후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김해 서상동에 수로왕의 무덤이 있고, 구산동에 허황후의 무덤이 있습니다. 허황후는 김해 허씨의 시조모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황후는 인도 사람이며 아유타국(阿踰타國)이라는 나라가 고향입니다.

 

허황후는 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먼 바닷길을 왔습니다. 그녀가 처음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요?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과 부산시 강서구 송정동 경계 지점에 망산도가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허태후가 처음으로 배에서 내린 곳이 망산도이고, 타고 온 돌배(石舟)가 바닷속에 뒤집혀 유주암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로왕이 몸소 마중을 나와 이 섬에서 멀리 해상을 바라보며 기다렸다고 하여 망산도라 부른다고 합니다. 한편 안골왜성이 있는 안골동 뒷산인 동망산이 당시 지칭했을 망산도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지금 망산도와 유주암은 부산시에 속해 있습니다.

 

- 표지석에 '망산도(望山島)'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는 허태후 관련 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기 48년에 가락국의 구간(九干)들이 수로왕에게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청하자 왕은 자신의 왕비는 하늘이 정해 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왕은 유천간(留天干)에게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점(乘玷)에 나가 망을 보게 하였다. 어느 날 서남쪽 해상에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단 배가 나타나자 유천간이 횃불을 들어 배를 인도하니 마침내 그 배는 망산도에 닿았고, 그 배에서 허태후 일행이 상륙하였다.

승점에 나가 있던 신귀간의 보고를 받은 왕은 친히 나아가 태후를 맞아들였다. 그날 밤 침전에서 태후가 말하기를 "소첩은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성은 허씨이며 이름은 황옥(黃玉)인데, 어느 날 꿈속에서 황천상제(皇天上帝)가 말씀하시기를 '가락국 수로왕은 본디 하늘이 내려보낸 사람이나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가서 짝을 지어라.' 하기에 달려왔노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그녀를 왕비로 맞아 혼인하고 백오십세가 넘도록 장수하였다.

 

- 망산도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에서 펴낸 <우리 고장 문화유산>에 허황후와 관련된 내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설명된 내용을 가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로왕이 즉위한 지 7년(서기 48년) 7월 27일에 구간들이 왕의 배필을 간택할 것을 아뢰니 왕은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작은 배와 말을 몰고 망산도에 가서 망보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점(乘岾)에 나아가 망보게 분부하셨다.

그때 문득 가락국 앞 서남쪽 해상에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을 보고 오는 배가 있었다. 망산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간 등이 먼저 횃불을 올리니 배를 마구 내달아 와 앞을 다투어 내리려 했다. 신귀간 등이 승점에서 이 모습을 보고 바로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아뢰었다.

공주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서 배를 대어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있었다. 거기에서 공주는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쳐 제사를 지내었다. 왕후가 비단 바지를 바쳤던 그 산언덕을 '능현(綾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 망산도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에서 펴낸 <우리 고장 문화유산>에 망산도가 어디인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락국 앞 서남쪽 해상에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을 보고 오는 배를 지금 말하는 망산도(말무섬)에서는 볼 수가 없다. 말무섬에서는 안골동의 뒷산인 실제의 '바라메(望山)'가 가리워서 서남쪽에서 오는 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망산도는 '바라메'를 '望山島'로 차자(借字) 표기한 이름이다. '바라메'는 안골동 뒷산 이름이고, 뒤에 안골포진 지도에는 '육망산(陸望山)'과 '동망산(東望山)'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게 된다.

안골동 뒷산을 '망산도'라고 섬처럼 표기한 것은 당시는 수위가 높고 교통도 불편하여 멀리 뭍에서 보면 섬으로도 보였을 것이다. 따라서 횃불을 올리며 배를 맞이한 곳은 안골동 뒷산인 '바라메'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기록된 승점이라는 표현 역시 현재 망산도가 잘못됐음을 증명하고 있다.

말무섬에서 횃불을 올렸다면 신귀간이 기다리던 승점은 어딘지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안골동의 바라메에서 본다면 승점은 마천동에서 용숫골로 올라가는 사자목(용추폭포 동쪽 위에 있는 고개. 보통 '밤낮재'라고 함)이 바로 보이므로 거기를 비정해 볼 수 있다. 김해로 오가는 길목이었으니 비정할 만한 곳이다. 말무섬에서는 어디로 보나 승점으로 비정해 볼만한 곳은 찾을 수 없다.

 

- 유주암

 

망산도에서 동북쪽으로 70m쯤 떨어진 바닷가에 바위섬인 유주암(維舟岩)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허태후가 타고 온 돌배가 바닷속에 뒤집혀 유주암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망산도와 유주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 기록에 의하면 수로왕이 왕이 된 지 7년이 지나도록 왕비가 없어 신하들이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는데 수로왕은 왕비는 하늘이 정해 줄 것이라고 말하고 유천간(留天干)을 보내 기다리게 한 곳이 망산도이다. 어느 날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색의 돛과 깃발을 단 돌로 만든 배가 허황후 일행을 태우고 나타나자 수로왕이 직접 나가 허황후를 맞이하여 혼례를 올리고 15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허황후 일행이 타고 온 돌배가 바닷속에서 뒤집혔는데, 그곳이 바로 망산도에서 동북쪽으로 70m쯤 되는 곳에 있는 바위섬인 유주암이라고 한다.

 

유주암. 정면에 보이는 산은 실제 망산도라는 설이 있는 망산.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에서 펴낸 <우리고장 문화유산>이란 책에는 앞서 소개한 유주암의 설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쪽박섬이라는 돌섬을 '유주각'과 대응해서 '유주암'이라고 하면서 공주가 타고 온 돌배가 뒤집혀 있다고 하는 이가 있다. 가락국기에는 종자에게 선물을 주어서 돌배를 돌려보내었다고 하였으므로 허무맹랑할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파사석탑 이야기에서 충분히 논거가 뒷받침된다. 결론적으로 후대에 허황후 설화와 불교 설화가 결합해 지어진 이야기로 봄이 타당하다는 얘기다.

허황옥 공주가 타고 온 배가 돌배라고 하니 돌로 만든 배로 아는 이가 있다. 석주(石舟)를 그대로 국역하면 '돌배'가 되지만, 돌로 만든 배가 아니라 실은 물건이 돌이어서 '돌배'라고 하였던 것이다. 나무를 실어 나르는 '나무배', 멸치를 실어 나르는 '멸치배'라고 하듯이.

 

- 유주각

 

망산도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로 300m쯤 떨어진 곳에 비각이 있습니다.

- 유주각

 

비각은 1908년에 세워진 유주각(維舟閣)입니다. 유주각은 허태후의 전기(傳記)를 길이 전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 비

 

유주각 안에 비가 있습니다.

 

비는 높이 1.73m, 폭 0.7m, 두께 0.36m의 석비입니다. 비 전면에 '대가락국 태조왕비 보주태후 허씨 유주지지(大駕洛國太祖王妃普州太后許氏維舟之地)'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유주각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인 목조 기와집입니다.

 

건물은 기단이 없이 장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습니다. 지붕은 부연(浮椽)을 둔 겹처마 맞배지붕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벽체 상부를 홍살로 장식한 전형적 비각 형태입니다.

 

- 모과나무

 

유주각 앞뜰 한쪽에 오래된 모과나무가 있습니다.

 

- 수로왕릉의 쌍어문

허황후가 어떻게 가락국으로 건너왔는지에 대해 설이 분분합니다.

 

허황후는 '보주태후(普州太后)'란 시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사천성 보주에서 살았던 인도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 증거로 학자들은 수로왕릉에 새겨진 쌍어문을 들고 있습니다.

 

쌍어문이란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진 문양입니다. 이것은 인도 아유타국으로 알려진 아요디아(Ayodhya)에서 발견되었으며 중국 보주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연관성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 파사석탑

 

허황후는 중국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면서 배가 풍랑에 중심을 잡고 잘 견딜 수 있도록 배에 무거운 돌을 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로왕비릉 파사각에 있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라고 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파사석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최근에 각 부재를 검토하여 새로이 탑을 복원하였다고 하나 본래의 부재와 똑같은지는 세밀한 고증이 필요하다. 석탑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권 제3 탑상편 제4 금관성파사석탑조(金官城婆娑石塔條)에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금관성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읍(邑)이 금관국으로 되어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오려고 하다가 파신(波神)의 노여움에 막혀서 할 수 없이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물가에 와서 닿았는데, 비범(緋帆: 붉은색의 배)·천기(茜旗: 붉은색의 기)·주옥(珠玉)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므로 지금도 이곳을 주포(主浦)라 한다. …(중략)… 탑은 사면으로 모가 나고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에는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매우 부드럽고 특이하여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파사석탑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호계사에 있던 탑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해부사로 있던 정현석(鄭顯奭)이 "이 탑은 허황후께서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에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탑은 배에 실은 돌을 두고 이르는 말로 보입니다.

 

- 장군차 재배지 김해 선곡다원

 

허황후는 가락국 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혼수품으로 금, 은, 보석, 비단 등 온갖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그중에서 차(茶) 씨앗을 가져온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차 중에서 장군차(將軍茶) 하면 김해를 꼽습니다. 그 이유는 김해가 장군차의 시배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윗글의 일부는 블로그 미디어 웜홀에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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