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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옆면)

 

경주시 내남면 상신리 길가에 퇴락한 비각이 하나 있습니다. 최치백 정려비(崔致柏 旌閭碑)가 있는 비각입니다.

- 비(앞면)

 

앞면에 크게 예서(隷書)로 '효자 증조봉대부 사헌부 지평 최공치백 정려비(孝子 贈朝奉大夫 司憲府 持平 崔公致柏 旌閭碑)'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비의 주인공 최치백(崔致柏, 1676~1744)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기를 먹지 않으니, 어머니가 "너 죽으면 나도 죽는다"라고 하여 그제야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로 지성으로 어머니를 모시니 꿩이 스스로 날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솔개와 개가 고기를 물어 준 일도 있었습니다. 미물도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벌어진 기적이었습니다. 이후 1728년에 이인좌의 난(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그는 효행과 충의를 다하였습니다.

69세로 최치백이 세상을 떠난 뒤 1749년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그의 효행과 충의를 조정에 알리자 영조가 사헌부 지평을 추증(追贈)하고 정려비를 세우도록 명하였습니다.

 

- 비각(뒷면)

 

비각 뒷면 모습입니다.

 

- 비(뒷면)

 

비 뒷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 비(뒷면)

 

비문을 지은 이는 수양(首陽) 오수채(吳遂采, 1692~1759)입니다.

 

오수채는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吳允謙)의 증손으로, 병조판서 오도일(吳道一)의 아들입니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여 1등 공신이 된 오명항(吳命恒)의 당숙(堂叔)이며,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의 손서(孫壻)로 그에게 배워 문장에 뛰어났습니다. 1748년에 부제학(副提學), 1753년에 대사성(大司成)에 이어 예조참판(禮曺參判)에 승진하였습니다. 이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듬해에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부제학·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지냈으며, 이후 개성유수(開城留守)를 거쳐 1758년 대사헌에서 관직을 떠났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효자의 아들 수곤(秀坤)이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하여 비명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고 하면서, 효자의 정려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주인공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고, 효행의 여러 가지 사연과 무신란(戊申亂)에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내력까지 써서 효행과 충절을 기리고 찬양하였습니다.

 

- 부분

 

해서(楷書)로 비문 글씨를 쓴 이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입니다. 비문 마지막 줄에 '완산인 이광사 서(完山人 李匡師 書)'라고 이름 앞에 본관만 쓴 것은 그가 아무런 벼슬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교 이광사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힙니다. 왕실 종친의 후예인 그는 영조 즉위 후 가문이 역적 집안으로 몰리면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서예에 몰두했습니다. 27세에 강화로 들어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을 배웠고, 20세 전후부터 당대 최고의 명필로 알려진 부친의 친구인 백하(白下) 윤순(尹淳)에게 나아가 37세까지 글씨를 배웠습니다. 글씨가 날로 발전하여 40세(1744년) 전후로 '원교체'라는 자신만의 서풍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가 만 50살 때인 영조 31년(1755년)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습니다. 이에 그의 부인은 절망하여 자결하였고, 그는 겨우 목숨만은 건지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가, 58세 되던 1762년에 유배지 부령에서 배우러 온 문인들에게 문장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다시 진도를 거쳐 신지도로 유배되어 1777년에 신지도에서 73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23년간의 유배 생활하는 동안 독창적인 글씨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야사(野史)의 총서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쓴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원교 이광사의 장남입니다. 이긍익의 호가 '연려실(燃藜室)'인데, 원교 이광사가 서실 벽에 붙이라고 써준 글자였다고 합니다. '연려실'은 한나라 유향(劉向)이 옛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에 불을 붙여 비추어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이긍익이 평생을 고난 속에 산 부친을 얼마나 흠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부분

 

문 마지막에 '숭정갑신후재임신'(崇禎甲申後再壬申)이라 쓰여 있습니다. 영조 28년(1752년) 임신년(壬申年)에 비가 세워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 비각

 

원교 이광사가 어떻게 오수채가 지은 비문을 쓰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원교 이광사는 역도들과 같은 당파로 몰려 오랜 세월 유배 끝에 유배지에서 죽은 죄인인데도 비에 그의 이름이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반역, 즉 역적(逆賊) 또는 역모(逆謀)에 관한 역옥(逆獄)을 조사한 내용을 담은 문서인 역안(逆案)에 이름이 오르면 그가 쓴 금석문을 깎아버리거나 파묻어버리는 것이 흔하였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원교 이광사의 개성 있는 글씨와 정려비 주인공의 아름답고 특별한 효행이 어우러진 이 비가 오랫동안 잘 보존되었으면 합니다.

 

* 윗글은 경북일보에 게재된 진복규 님의 글 '경주 내남 상신리 최치백 정려비'를 일부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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