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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토리 느티나무
외토리((外吐里)는 합천 삼가면(三嘉面)의 최남단에 있으며, 진주 남강의 지류인 양천강(梁川江)의 물줄기에 따라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은 들판을 끼고 있습니다.
외토리의 중심은 토동(兎洞, 톳골)입니다. 이곳은 인천 이씨(仁川李氏)의 세거지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태어난 외가(外家)가 있습니다.
- 남명 조식 선생 생가터
토동은 양천강이 굽이 돌아가는 곳에 있습니다.
너른 들판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강은 크게 원을 그리듯 돌아가며, 이 모두를 주위 산들이 둥글게 안았습니다. 이곳 지형은 이른바 암토끼인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으로, 일찍부터 '황매산 남쪽 기슭(黃梅南麓) 원기가 모이는 곳(元氣之會)'이라 하였습니다. 이렇듯 이곳은 큰 인물이 태어날 곳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영모재(永慕齋) 이온(李榲)의 고손자(高孫子, 손자의 손자)인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따님이 판교(判校) 조언형(曺彦亨)에게 시집갔습니다. 연산군 7년(1501년)에 조언형은 토동 처가에서 3남 5녀 가운데 두 번째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남명 조식 선생입니다.
- 외토리 느티나무
의령 대의면(大義面)에서 남명교를 건너면 합천 외토리 땅입니다.
토동마을로 가는 이곳 삼거리 길가에 노거수가 있습니다. 외토리 느티나무입니다.
- 외토리 느티나무
외토리 느티나무는 멀리서 보면 두 그루 느티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듯이 보입니다.
- 밑동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한 뿌리에서 두 줄기가 자랐습니다.
- 외토리 느티나무
느티나무 옆에 남명 조식 선생의 시비가 있습니다.
홀로 선 나무를 읊다/ 詠獨樹
무리를 떠나 홀로 있기에/ 離群猶示獨
스스로 비바람 막기 힘들겠지/ 風雨自亂禁
늙어감에 머리는 없어졌고/ 老去無頭頂
상심하여 속내가 다 타버렸네/ 傷來燬腹心
아침에는 농부가 와서 밥 먹고/ 穡夫朝耦飯
한낮에는 야윈 말이 그늘에서 쉬네/ 瘦馬午依陰
다 죽어가는 등걸에서 무얼 배우랴/ 幾死査寧學
다만 하늘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네/ 昇天只浮沈
수령: 450년, 높이: 25m. 가슴높이 둘레: 5.3m.
소재지: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1374번지
- 독우정
외토리 느티나무에서 토동마을 쪽으로 조금 가면 길가에 독우정(篤于亭)이 있습니다.
- 비각
독우정 바로 옆에 비각이 있습니다. 비각에는 쌍비(雙碑)가 있습니다. 외토리 쌍비입니다.
- 쌍비
쌍비는 영모재(永慕齋) 이온(李榲, ?~1379)의 효행을 기려 세운 비입니다.
고려 우왕 9년(1383년)에 이온의 효행이 전해져 조정에서 관리들을 보내어 쌍비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하나는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긴 비이고, 또 하나는 글자가 없는 백비(白碑)입니다.
백비의 유래는 중국 진(晉)나라 때 사안(謝安)이 명재상으로 봉직하고 죽으니 나라에서 그의 공덕을 문자로 다 형언할 수 없다고 하여 백비를 세워 공덕을 기린 역사가 진서(晉書)의 사안전(謝安傳)에 전합니다.
- 쌍비
왼쪽 비의 앞면에는 이온이 효행을 행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뒷면에는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비는 언제 세워졌는지 기록이 남아 있고, 고려 시대 효자비가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 쌍비
오른쪽 비도 왼쪽 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효자비로 추정됩니다.
쌍비는 원래 비의 몸돌만 남아 있던 것을 조선 숙종 12년(1686년)에 머릿돌과 받침돌을 새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세상 사람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비석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마을 앞으로 옮겼다가 일제강점기에 원래 장소인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 용호정
토동마을의 동쪽 들판을 강궤평(降櫃坪), 일명 번개들(電坪)이라고 합니다. 이 들판에 용연사(龍淵祠)가 있습니다. 용연사는 고려 말 중현대부(中顯大夫)를 지낸 영모재(永慕齋) 이온(李榲)이 거주한 유지(遺趾)에 후손들과 유림이 그를 추모하여 세웠습니다.
이온(李榲)의 효행과 관련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이온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어버이 몸에 편안한 물건과 입에 맞는 음식을 마련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양식을 잇기가 어려워지자 하늘을 우러러 슬피 호소하니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고 뇌성벽력이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그때 앞 들판에 하나의 금궤가 떨어져 있음을 발견하고 수령에게 보고하였다.
수령이 확인하니 '이온양친지수'(李榲養親之需, 이온이 어버이 봉양에 쓸 것)라고 적혀 있었다. 이온은 손을 씻고 향을 피운 후 꿇어앉아 두 번 절하니 금궤가 열리고 흰쌀이 가득하였다. 쌀은 계속 퍼내어도 줄어들지 않아 3년 동안 공양을 이었다.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금궤가 내려올 때와 같이 뇌성벽력이 치면서 폭우가 쏟아지더니 금궤는 사라져 버렸다.
당시 사대부(士大夫)는 100일이면 탈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온은 어버이 돌아가신 후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습니다. 삼년상 후에도 묘소 아래에 집을 지어 거처하면서 집 이름을 '영원히 사모한다'는 뜻으로 '영모재'(永慕齋)라 하고 애통해하였습니다.
- 용호정
이곳은 원래 1580년에 용연사(龍淵祠)를 세워 이온(李榲)을 향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688년에 용연서원(龍淵書院)을 건립하여 추모하였습니다. 그러나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되었습니다.
그 후 1910년에 후손과 유림이 다시 뜻을 모아 그 터에 용호정(龍湖亭)을 건립하고 그 뒤쪽에 비각과 용연사, 그리고 동재(東齋), 서재(西齋)를 차례로 지었습니다. 광복 이후인 1947년에 용호정을 용연서원으로 복원하였습니다.
지금은 해마다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 매년 음력 3월에 '정'(丁)자가 들어가 있는 날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날짜)에 많은 유림과 후손이 참석하여 용연사에서 추모 향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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