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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김해 칠산재

sky_lover_ 2022. 5. 24. 06:09

- 칠산재로 올라가는 길

 

김해 칠산(七山, 89m)은 장유(長有) 동쪽 김해평야에 홀로 있는 나지막한 산입니다. 칠산(七山)이라는 이름은 산봉우리가 일곱 개 솟아있다고 해서 칠봉산이라고 부른 데서 왔다고 합니다.

 

칠산 중턱에 칠산재(七山齋)가 있습니다.

 

칠산재는 이동마을 골목길을 지나 산길을 따라 한동안 올라가면 있습니다. 칠산재까지 시멘트 포장길이 있지만, 좁아서 조금 위험하고 칠산재 앞에서 차가 갈 수 없게 길을 막아 놓았습니다. 힘이 들더라도 마을 길가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 외삼문

 

칠산재에 닿으면 외삼문인 광정문(光正門)이 있습니다.

 

칠산재는 분성 배씨(盆城裴氏)의 수관조(受貫祖, 관향(貫鄕)을 받은 조상)인 분성군(盆城君) 배원룡(裴元龍)의 무덤 조금 아래쪽 지역에 세워진 재각(齋閣)입니다. 관향(貫鄕)은 본관(本貫)이라고도 합니다. 성씨 앞에 동족(同族) 집단을 표시하는 땅이름을 붙인 것을 말합니다.

 

이곳 재각은 재각의 일반적 건축양식에 맞추어 외삼문인 광정문(光正門), 강당인 칠산재(七山齋), 내삼문인 추원문(追遠門), 사당인 영모사(永慕祠)가 각각 위계에 맞게 직선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 팽나무

 

외삼문 앞뜰 한쪽에 오래된 팽나무가 있습니다.

 

- 팽나무

 

나무는 얼핏 보기에도 백 년 이상이 되었음 직해 보입니다.

 

- 팽나무

 

우람한 나뭇가지가 세월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 강당

 

강당인 칠산재(七山齋)입니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집입니다.

 

- 강당

 

1759년에 간행된 <분성배씨세보(盆城裵氏世譜)>에 "김해칠산궁곡이(金海七山宮谷而)"라 한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엽 이전에 재각이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1764년에 종회(宗會)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901년 1월에 작성된 김해군 재산대장 내역서에 칠산재가 배씨 문중 재실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재각은 1900년대 이후 여러 차례 걸쳐 중수되었습니다. 특히 1958년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습니다. 그때 재각이 지금 재각으로 보입니다.

 

- 전사청

 

전사청(典祀廳)입니다. 집기를 보관하고 음식을 마련하는 곳입니다.

 

- 내삼문

 

내삼문인 추원문(追遠門)입니다.

 

- 사당 뜰 담 너머로 바라본 강당

 

사당 뜰 담 너머로 바라본 강당 뒷모습입니다.

 

- 사당

 

사당인 영모사(永慕祠)입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입니다.

 

- 사당

 

사당의 문이 굳게 잠겨 있습니다. 이곳에 분성 배씨의 시조(始祖), 중시조(中始祖), 수관조(受貫祖), 이렇게 3인이 봉향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배씨(裵氏)는 한지부(漢祗部, 경주 백률사 부근) 사람인 지타공(祗沱公)을 시조로, 고려 개국 공신인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습니다. 배현경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인 배사혁(裵斯革)에게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각 아들에 따라 분성(盆城, 김해), 성산(星山, 성주), 달성(達城, 대구), 흥해(興海)로 분관(分貫)이 되었습니다.

 

- 칠산재

 

재각 뒤쪽 지역에 분성군 배원룡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면서 바라본 칠산재 모습입니다.

 

- 묘비

 

무덤 앞의 묘비입니다.

 

묘비에는 '고려병부상서겸도원수분성군배공지묘'(高麗兵部尙書兼都元帥盆城君裴公之墓)라고 적혀 있습니다.

 

- 분성군 묘

 

분성군 배원룡의 무덤입니다.

 

분성(盆城)은 김해의 진산인 분산성(盆山城)에서 유래합니다. 분성은 김해를 뜻합니다. 김해는 본래 가락국(駕洛國)이었습니다. 신라에 병합되어 법흥왕 때 금관군(金官郡)이 되었습니다. 문무왕 때 금관소경(金官小京)이 설치되었고, 경덕왕 때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때 김해(金海)라는 명칭이 등장합니다.

 

<분성배씨대동보(盆城裵氏大同譜)>에 의하면, 분성군 배원룡은 가락군(駕洛君) 배사혁의 아들 네 명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우왕(禑王) 때 계림부윤(鷄林府尹)을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도원수(都元帥)를 지냈고, 선대의 봉직으로 나라에 공이 있어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습니다.

 

- 칠산재 앞에서 바라본 들판

 

칠산재 앞쪽으로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김해평야로 알려진 들판입니다.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구획된 들판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쌀을 생산하는 대표적인 곡창지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곳 들판은 여전히 벼를 재배하지만, 참외, 토마토, 화훼류 등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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