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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포스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실제 생존했던 스님의 진영(眞影) 조각상인 희랑대사좌상(希朗大師坐像)이 2020년 10월에 국보(제333호)로 승격 지정된 이후 처음으로 해인사 밖으로 나들이를 나왔습니다.

부산시립박물관에서 5월 12일부터 7월 10일까지 특별기획전 '치유의 시간, 부처를 만나다' 전을 열고 있습니다. 이 특별기획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희랑대사좌상

 

오래전부터 서양에서는 실존했던 인물의 조각상이 흔했지만, 우리나라는 근대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조선 때에도 초상조각은 드물었고, 고려나 신라로 올라가면 낮달을 보기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이채롭게도 해인사에 고려 초의 초상조각이 한 점 전해옵니다. 바로 희랑대사좌상입니다.

 

두 손을 배 앞에 모은 채 가부좌하고 있으며, 적색, 녹색, 황색의 동심원 형태의 점문(點文)이 있는 흰색의 장삼(長衫)을 입고, 그 위에 녹색으로 분할된 붉은색의 가사(袈裟)를 걸치고 있습니다. 왼쪽 어깨 위에는 가사를 고정하는 끈과 삼각형의 술 장식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희랑대사좌상은 마르고 아담한 등신대(等身大)의 체구, 인자한 눈빛과 미소가 엷게 퍼진 입술, 노쇠한 살갗 위로 드러난 골격 등이 매우 생동감이 넘쳐 생전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 옆모습

 

희랑대사(希朗大師)는 10세기 전반에 고려 왕실의 비호를 받은 해인사 고승이자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學僧)입니다. 신라 진성여왕 3년(889년)에 태어나 15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으며, 10세기 중엽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에 머물며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전하며, 정치적으로는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 부분

 

바라보이는 옆얼굴과 거울에 비친 반대쪽 옆얼굴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요?

 

- 뒷모습

 

뒷모습입니다.

 

면벽 수행(面壁修行)이라 했던가요? 어깨가 굽은 뒷모습은 한평생을 오롯한 정진으로 일관한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 부분

 

어깨 뒤로 넘어온 가사를 고정하는 끈과 삼각형의 술 장식이 눈길을 끕니다.

 

- 뒷모습

 

뒤쪽에서 바라보니... 뒷모습과 앞면 유리에 비친 앞모습이 함께 바라보여 묘한 느낌을 줍니다.

 

- 옆모습

 

가사(袈裟)는 분소의(糞掃衣)라고도 합니다. 수행자들이 버려진 옷감 조각을 기워 흙과 분뇨를 이용해 염색하여 사용한 데서 유래합니다. 붉은색 가사의 녹색 분할선은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법의(法衣)에서 장삼(長衫)의 점문(點文)과 가사의 색이 조선 후기 불화에서 보이는 표현과 유사하고, 붉은색 가사의 녹색 분할선이 조각상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채색은 18세기 이후에 다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 부분

 

상체 앞모습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 부분

 

얼굴입니다.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합니다. 짜릿한 전율마저 느낍니다.

 

- 부분

 

쌍꺼풀이 있는 작은 눈, 커다란 코... 맑은 눈빛은 어떤가요?

 

- 부분

 

가늘고 얇은 입술, 여러 개로 나 있는 입가의 주름, 얇은 귀, 움푹 들어간 양 뺨, 튀어나온 광대뼈, 좁고 뾰족한 턱... 스님이 살아온 세월이 차분하게 담겼습니다.

 

- 부분

 

긴 목에는 성대 뼈가 불거졌고, 그 아래 열린 옷깃 안으로 빗장뼈가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흉혈국인'(胸穴國人)이라는 그의 별칭을 상징하듯 작은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 흉혈(胸穴)은 해인사에 전해오는 설화에 의해 희랑대사가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러한 고승의 흉혈은 신통력을 상징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굳이 사실 여부를 따질 것까지는 없지 싶습니다.

 

- 부분

 

하체 앞모습입니다.

 

뼈가 불거지도록 앙상한 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부좌하고 있습니다. 더없이 단정한 손 모양입니다.

 

- 희랑대사좌상

 

희랑대사좌상은 얼굴,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乾漆)로,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건칠은 삼베와 종이 등에 옻을 바르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하는 방식으로 형태를 만드는 기법을 말합니다.

희랑대사좌상은 늦어도 10세기를 넘기기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사한 시기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승(高僧)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祖師像)이 많이 만들어졌으나, 우리나라에는 유례가 드뭅니다.

 

이 좌상은 조선 시대 문헌 기록을 통해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 진상전(眞常殿), 조사전(祖師殿), 보장전(寶藏殿)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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