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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별장
부산 동래구(東萊區)는 조선 시대 지명인 동래부(東萊府)에서 유래하였고, 이곳 온천동(溫泉洞)은 동래온천(東萊溫泉)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온천동을 지칭하는 명칭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영취사(靈鷲寺)를 기술하면서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萇山國)의 온정(溫井)에서 목욕하고 경주로 돌아오던 길에..."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처음 등장합니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년)>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 등장합니다. 조선 시대 때 이곳은 관리를 위해 설치한 여관인 온정원(溫井院)이 있었을 뿐 마을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예전에 이곳은 온천 주변에 숙박 요식업과 음식점 등이 밀집하였습니다. 그래서 온천장(溫泉場)이라고 불리던 지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산대학교 앞, 동래역 주변, 연산 로터리 주변이 성장하면서 급격히 쇠퇴하였습니다.
- 동래별장
이곳 온천장에 '동래별장'(東萊別莊)이라는 음식점이 있습니다. 멋진 정원과 일본식 건물이 있는 음식점입니다.
원래 동래별장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의 별장입니다. 후사타로는 고종 17년(1880년)에 오사카에서 부산으로 건너와 부자가 된 일본인 상인입니다.
- 동래별장
개항 후 일본인은 동래온천을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고종 20년(1883년)에 동래부에서 여탕 일부를 빌려 운영한 것이 일본인에 의한 개발의 시초였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목욕탕, 여관, 별장 등 다수의 휴양 시설이 생겼습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 동래별장도 세워졌습니다. 당시 세워진 일본인 시설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동래별장입니다.
1912년에 동래별장이 이미 있었다고 하며, 1929년 8월에 옛 별장 옆에 새 별장이 완공되었습니다. 이때 10만 원의 자금을 들여 금정산의 송림으로 정원을 꾸미고, 많은 돌을 사용하여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1929년과 1939년에는 일본 왕족이 머물렀는데, 이들을 위해 독자적인 탕원(湯源)을 조성하고 금정산 돌로 욕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해방 후 미군정 때 미군 휴양소로 사용되다가 이진호에게 불하되었습니다. 6·25 전쟁 때는 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이후로도 부산을 방문하는 유명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이 들른 곳으로 유명합니다. 1965년 3월부터 요정으로 용도 변경된 후 10회의 휴업과 폐업을 거듭하다가 2000년 10월부터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동래별장
동래별장은 지상 2층 목조 건물입니다. 일본식 기와지붕을 하였고, 외벽은 회벽 및 일부 목재를 사용하였습니다. 정원은 전통 한국식과 일본식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 정원
별장 정원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전통 일본식 석등이 서 있습니다.
- 출입문
별장 정원으로 들어가는 전통 일본식 출입문입니다.
- 정원
출입문을 들어선 후 바라본 별장 모습입니다.
- 정자
별장 정원에 정자가 있습니다. 정자는 사각 지붕의 전통 한국식 건물입니다.
- 팔작지붕집
별장 정원에 팔작지붕의 전통 한국식 건물도 있습니다.
- 삼층석탑
정원 한쪽에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 삼층석탑
기단부는 없어지고, 탑신부와 노반만 남아 있습니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3단입니다.
- 삼층석탑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 정원
별장 정원 한쪽에 부도가 있습니다. 연대는 미상입니다.
- 동래별장
동래별장을 둘러보며 만감이 교차합니다. 이곳은 애환(哀歡)이 서린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픔과 그리고 정원과 건물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함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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