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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예림서원
밀양 후사포리에 있는 예림서원(禮林書院)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입니다.
예림서원은 처음에는 조선 명종 22년(1567년)에 당시 밀양부사 이경우(李慶祐)가 밀양 유림의 요청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조언을 받아 자씨산(慈氏山) 아래의 영원사(靈源寺)터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德城書院)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이황이 김종직을 추앙하여 이름을 점필서원(佔畢書院)으로 바꾸고 친필 편액을 걸었습니다. 그러다 인조 13년(1635년)에 서원이 퇴락하여 예림리로 옮겼고, 인조 15년(1637년)에 이름도 예림서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숙종 6년(1680년)에 서원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자 지금의 장소로 옮겼고, 그 후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습니다.
고종 8년(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제 훼철되었으나, 고종 11년(1874년)에 강당을 짓고 예림재라 하였습니다. 그 후 예림서원으로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독서루
예림서원은 밀양의 남산인 종남산 북쪽 구릉 끝자락에 있습니다.
건물의 배치는 강학 공간을 앞에 두고 제향 공간을 뒤에 둔 전학후묘의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당인 육덕사(育德祠), 강당인 구영당(求盈堂), 문루인 독서루(讀書樓)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 강당 영역의 아래쪽
독서루를 들어서면 강당 영역의 아래쪽입니다.
이곳에는 유생들이 기숙했던 몽양재(蒙養齋)와 장판각인 열고각(閱古閣)이 있습니다. 몽양재란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집이라는 뜻이고, 열고각은 옛 서적을 열람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열고각에는 김종직의 저서인 <이존록>과 <점필재문집>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 강당 영역의 위쪽
강당 영역의 위쪽에는 강당의 앞에 동재와 서재에 해당하는 돈선재(敦善齋)와 직방재(直方齋)가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 강당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입니다. 가운데 대청 3칸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강당의 이름은 구영당(求盈堂)입니다. '구영(求盈)'은 이황의 시구 가운데 "점필재의 문장은 일어났다가 쇠했으나, 그가 구한 도는 뜰에 가득 찼네"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가득 참, 즉 완성됨을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 강당에 걸린 편액
강당 정면에 걸린 편액입니다.
편액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예림서원(禮林書院)'과 '을묘삼월상완 후학분성배길기근서(乙卯三月上浣 後學盆城裵吉基謹書)'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편액은 1975년 3월에 배길기(裵吉基, 1917~1999)가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배길기는 경남 김해 출신의 서예가로, 호는 시암(時庵)이고, 본관은 분성(盆城)입니다.
- 돌기둥 1
강당 앞뜰에 돌기둥 2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돌기둥은 다른 곳에 쓰였던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잘 다듬어진 뒷면에 '경신■팔월일입(庚申■八月日立)'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경신(庚申)'은 예림서원이 후사포리로 옮겨진 1680년으로 추정됩니다.
- 돌기둥 2
다른 돌기둥입니다. 거칠게 다듬어진 뒷면에 '서재경신■(西齋庚申■)'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즉 경신년(1680년 추정)에 서재를 세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 정양문
강당 뒤쪽에는 사당인 육덕사(育德祠)가 있습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정양문(正養門)입니다. 지금의 육덕사와 정양문은 1974년에 세워졌으며, 육덕사에는 김종직, 박한주(朴漢柱), 신계성(申季誠)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양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