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군위 위성리 마애비와
마애불
군위
위성리는 군위읍에서 서북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마애삼존불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마애불과 약간 떨어진 곳 암벽에 마애비
하나가 있습니다.
이 마애비는 무슨
비일까요? 조선시대 군위현감의 공덕비입니다. 왜 현감 공덕비를 군위읍으로부터 꽤 많이 떨어진 이곳에, 그것도 암벽에 새겨놓았는지
궁금해집니다.
- 군위 위성리
마애비
마애비는 비좌와 비신, 그리고 이수가 도톰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비신에 새겨진 글자는 잘 알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 '현감남후□□영세불망비(縣監南侯□□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름에 해당하는 두 글자가 잘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질 않은 글자는 '태보(泰普)'일 것입니다.
역대 군위현감 가운데 남(南) 씨 성을 가진 사람은 남태보(南泰普)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마애비는 조선 영조 때 군위현감을 지낸 남태보를 기려 조성된
것입니다.
마애비 바로 옆에는 '동치 육년 정묘 이월 일(同治六年丁卯二月日) 화산은사
이림재(華山隱士李琳在)'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습니다. 동치 6년 정묘년은 1867년입니다.
그런데 남태보는 1748년 9월부터 1753년 8월까지
군위현감을 지냈습니다.
남태보가 군위현감을 지낸 시기와 무려
100년 넘는 시간 차이가 납니다. 이것은 마애비와 어떤
관계일까요?
- 군위 위성리
마애비
남태보(南泰普, 1694~1773년)는 의령 사람으로, 자(字)는 숙도(叔燾), 호는
서산(西山)입니다. 아버지 남근명(南近明)과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조선왕조의 지방수령으로서는 뛰어난 안목을 지닌
역사가였습니다. 군위현감 때 군위읍지인 <적라지(赤羅誌)>를 편찬했고, 익산군수 때는 익산읍지인 <금마지(金馬志>)를 편찬했습니다.
또한, 군위현감 때 서당을
세우고 백성을 구휼(救恤)한 훌륭한 목민관이었습니다. <적라지>에 실린 다음과 같은 그의 글에서 고을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권장한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와 술은 이도(吏道)가 아니며, 이도의 근본은 농민에게 있다.
백성들의 얼굴에 굶주림의 기색이 역력하고, 길가에는 굶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면, 장차 세상 사람들은 이 고을의 목민관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 (0) | 2014.04.12 |
---|---|
군위 위성리 마애삼존불 (0) | 2014.04.11 |
의성 생송리 마애보살좌상 (0) | 2014.04.09 |
상주 무곡리 삼층석탑 (0) | 2014.04.08 |
부인사 일명암터 석등 (0) | 2014.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