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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수로왕릉
김해는 가야의 본거지입니다. 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무덤 또한 이곳에 있습니다. '수로'(首露)라는 이름은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색 알 여섯 가운데 맨 처음 나왔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수로왕릉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입니다. 봉분 앞에는 능비와 상석 등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의하면 199년에 158세로 수로왕이 붕어하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일장(一丈)의
빈궁(賓宮)을 짓고 장사를 지낸 후 주위 300보를 수로왕묘(首露王廟)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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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의 돌담
지금 봉분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정사각형으로 돌담을 둘렀습니다. 돌담 한쪽에는 밖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고, 그곳에 고목 한 그루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섰습니다.
- 수로왕릉의 뒤쪽
수로왕릉에서 왕릉 돌담 밖의 양옆과 뒤쪽이 호젓하면서도 운치가 있습니다. 빽빽이
나무가 들어선 이곳은 한낮에도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 여름철 무더위를 피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물고기 문양
수로왕릉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왕릉 앞의 납릉정문(納陵正門)에 그려진
'쌍어문'(雙魚紋)입니다.
쌍어문은 탑을 가운데 두고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양이
인도의 아요디야 지역에서 사용하는 문양과 닮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문양을 인도 아유타국 공주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숭선전지>(崇善展誌)에 따르면, 쌍어문은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납릉(수로왕릉) 전각들이 증축될 때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의 쌍어문이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점을 제쳐놓아도 지금부터 2,000여 년 전 인도 아유타국에서 김해까지
그 머나먼 거리를 과연 배를 타고 올 수
있었을까요?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은 구지봉 옆에 있습니다. 수로왕릉과는 북쪽으로 약 1km 남짓 떨어져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허황후는 수로왕보다 10년 앞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허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두 무덤을
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썼을까요?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습니다. 능 앞에는 조선 인조 25년(1647년)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고 새긴 능비가 있습니다.
이 무덤은 외형이나 규모로 보아 구산동 고분군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산동 고분군은 발굴조사를 통해 6세기 중엽의 돌방무덤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덤을 수로왕비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추측건대 후대에 <삼국유사>의 허황후 장지 기록에 맞추어 이 무덤을 수로왕비릉으로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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