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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덕왕릉의 문인석
신라 왕릉 앞에 무인석과 문인석을 세운 이유는 나름대로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왕릉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그리고 죽어서도 살았을 때와 같이 왕의 아래에 문무백관이 시립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인석과 문인석이 모든 신라 왕릉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몇몇 왕릉에만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인석이나 문인석이 남아 있는 신라 왕릉은
성덕왕릉, 괘릉, 흥덕왕, 이렇게 세 곳입니다. 물론
다른 신라 왕릉에도 원래는 있었지만 후에 없어진 곳도 있을 것이고, 처음부터 없었던 곳도 있을 것입니다.
먼저 성덕왕릉에는 문인석 1구만 온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래는 이곳에도 무인석과 문인석이 모두 쌍으로 있었을 것입니다. 이곳의
문인석은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데,
후대 신라 왕릉인 괘릉의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성덕왕릉의 문인석이 후대 신라 왕릉에서 문인석의 기준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 괘릉의 무인석과 문인석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에는 각각 2구씩의 무인석과 문인석이 있습니다.
문인석은 자세가 정적이고, 얼굴이 동양인의 모습이며, 이에 비해 무인석은 역동적이고, 얼굴도 서역인의 모습을
하였습니다.
- 흥덕왕릉의 무인석과
문인석
흥덕왕릉에도 괘릉에서와 같이 각각
2구씩의 무인석과 문인석이 있습니다. 이 두 왕릉의 것을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먼저 무인석은 그 모습이나 자세는 서로 닮았지만, 흥덕왕릉 것이 생동감이 떨어집니다. 문인석 또한 기본적인 모습은 서로 비슷하지만, 흥덕왕릉 것이 둔중해 보입니다. 어쨌든 서로 쌍둥이처럼 닮은 것은 아니지만,
형제처럼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전체적으로 흥덕왕릉의 것은 괘릉의 것을 본떠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솜씨가
괘릉의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한 시대의 예술적 역량도 정점에 다다르면 그 후로는 점차 쇠퇴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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