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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덕왕릉 귀부
신라 제42대 왕인 흥덕왕(興德王)은 헌덕왕의 뒤를 이어 826년에 왕위에 올라 죽을 때까지 10년간 재위하였습니다.
그는 소성왕(신라 제39대 왕)과 헌덕왕(신라 제41대 왕)의 동생입니다. 그의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은 소성왕의 딸입니다.
그는 조카와 결혼하였고, 헌덕왕을 도와
조카인 애장왕(신라 제40대 왕)을
죽였습니다. 헌덕왕에게는 두 왕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윤리나 정통성보다는 힘이 우선하였습니다.
장화부인은 헌덕왕이 왕위에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후비를 맞을 것을 진언하였지만, 끝내 거부하고 홀로 지냈습니다. 836년 12월에 그가 죽자 유언에 따라서 장화부인의 능에 합장 되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후사(後嗣)가 없었고, 이것이 결국
그의 사후에 왕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으로 이어졌습니다.
- 흥덕왕릉
귀부
이제 흥덕왕릉의 귀부를
살펴볼까요?
흥덕왕릉 귀부는 여러 곳이 깨어져 자세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발톱도 깨어졌고,
등의 일부도 깨어졌습니다. 특히 머리 부분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깨부순 것처럼 훼손이 심합니다.
이처럼 비의 몸돌인 비신과 머릿돌인 이수가 없어졌고, 받침돌인 귀부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귀부 자체만으로도 거대합니다. 본래 모습은 얼마나 크고 웅장했을까요? 이 당시 신라는 서서히 저물어가는 왕조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여력은 남아 있어 이런 웅장한 귀부를 남겼을 것입니다.
- 성덕왕릉
귀부
또 다른 신라왕릉인 성덕왕릉에 있는 귀부도 한 번 살펴봅시다. 두 귀부 모두가 깨어져 자세한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그 시대 상황을 어렴풋이 엿볼 수 있어 서로 비교해볼 만합니다.
성덕왕릉 귀부가 만들어졌던 당시의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룬 후 그
꽃을 활짝 피워가던 시기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서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까?
성덕왕릉 귀부는 신라 왕릉에 있는 귀부 가운데 가장 뛰어났을 것입니다.
흥덕왕릉 귀부보다 더 세밀하면서도 역동적입니다. 지금도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귀부는 경덕왕(신라 제35대 왕)이 아버지 성덕왕(신라 제33대 왕)을 위해 그 시대의 예술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조성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추정은 삼국사기에 "경덕왕 13년(754년)에
성덕왕릉에 비(碑)를 세웠다."라는 기록으로도 뒷받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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