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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암서원
합천군 삼가면(三嘉面) 외토리(外吐里) 토동(兎洞)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자 실천 성리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이곳 동쪽 들판에 남명 조식 선생을 제향한 용암서원(龍巖書院)이 있습니다.
용암서원의 전신은 선조 9년(1576년)에 노흠(盧欽), 송희창(宋希昌) 등 여러 선비가 의논하여 삼가현의 서쪽 20리 근처 회현(晦峴) 아래에 세운 회산서원(晦山書院)이라고 합니다. 그 후 선조 34년(1601년)에 회산서원을 다시 세우면서 이곳의 터가 좁아 여러 선비가 의논하여 봉산면 황강(黃江) 앞으로 서원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서원 이름을 향천서원(香川書院)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4년 후인 선조 38년(1605년) 8월에 남명 조식 선생의 위판(位板)이 향천서원에 봉안되었고, 광해군 1년(1609년)에 향천서원은 용암서원(龍巖書院)으로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용암서원은 1871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습니다.
- 안내도
용암서원 안내도입니다.
지금의 용암서원은 4년간 사업비 16억 원을 투입해 2007년에 숭도사(崇道祠), 전사청, 내삼문, 용암서원 강당, 존성재(存誠齋), 한사재(閑邪齋), 집의문(集義門), 관리사 등을 복원하였습니다.
2002년 12월 31일부터 2004년 1월 17일까지 부지를 조성하여 사당인 숭도사와 전사청, 내삼문을 착수하여 완료하였고, 2003년 2월 22일에는 숭도사의 상량식을, 2005년 8월 20일에는 용암서원 강당의 상량식을 거행하였습니다. 2006년 9월 10일에는 숭도사, 용암서원, 거경당, 한사재, 존성재, 집의문 등의 현판을 완성하였습니다. 2007년 4월 25일에 위패(位牌)의 봉안식을 거행하였고, 26일에 용암서원의 준공식을 하였습니다.
- 남명 조식 선생 흉상
조식(曺植, 1501∼1572)은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입니다. 김우옹(金宇顒), 곽재우(郭再祐)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입니다.
그는 삼가현(三嘉縣, 지금의 합천) 톳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습니다.
- 김해 산해정
26세 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현으로 돌아가 3년 상을 마친 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특히 31세 때 서울 친구이던 이준경과 송인수(宋麟壽)로부터 선물 받은 <심경(心經)>과 <대학(大學)>을 읽고 성리학에 침잠하였습니다. 1538년에 경상도관찰사 이언적(李彦迪)과 대사간 이림(李霖)의 천거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45세 때 을사사화로 병조참의 이림(李霖), 사간원 사간 곽순(郭珣), 성우(成遇) 등 가까운 사람들이 화를 입자 세상을 탄식하고 더욱 숨을 뜻을 굳혔으며, 마침 모친상을 당함에 삼가현으로 돌아가 시묘(侍墓)하였습니다. 상복을 벗은 후에는 김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삼가현으로 돌아온 후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이곳에서 제자들 교육에 힘썼습니다. 1548~1559년에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단성현감,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하였습니다.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 산청 산천재
61세(1561년) 때 지리산 기슭 진주 덕산(德山,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습니다.
1566년에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왕을 만나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사직 하향하였습니다. 1567년에 즉위한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조정이 헛된 자리로만 대우함을 알고 늙고 병들었음을 구실로 끝내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오건(吳健), 정인홍(鄭仁弘), 하항(河沆), 김우옹, 최영경(崔永慶), 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가 찾아와 학문을 배웠습니다.
- 강당
남명 조식 선생 사후 1576년에 그의 제자들은 산천재 서쪽의 시천천 가에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세운 데 이어 그의 고향 삼가현에 회현서원(晦峴書院, 뒤에 龍巖書院)을 세웠고, 1578년에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습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대북(大北) 세력이 집권하자 그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세 서원이 모두 사액서원이 되었고, 남명 조식 선생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만큼 사화가 자주 일어난 시기로서 훈척정치((勳戚政治)의 폐해가 극심했습니다. 그는 성년기에 두 차례의 사화(기묘사화, 을사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습니다.
저서로는 문집 <남명집(南冥集)>,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 파한잡기(破閑雜記)가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南冥歌)> 등이 있습니다.
- 용암서원 묘정비
강당 옆 뜰에 용암서원 묘정비(龍巖書院廟庭碑)가 있습니다.
이 비는 남명 조식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순조 12년(1812년)에 그를 향사하고 있던 용암서원의 묘정에 세워졌습니다. 1987년 합천댐 건설로 용암서원 터가 수몰되자 용주면 죽죽리 산26번지로 이전되었다가 2007년 용암서원이 복원됨으로써 2011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비의 크기는 가로 0.8m, 세로 1.8m, 폭 0.25m입니다.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위에 직사각형 비신을 세우고 태극무늬의 머릿돌을 얹었습니다. 비문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삼가현감(三嘉縣監) 오철상(吳澈常)이 해서체로 썼습니다.
- 받침돌
받침돌입니다.
전체적으로 거북 형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머리만 보면 거북인지 아닌지 영 헷갈립니다.
- 받침돌
받침돌 뒷모습입니다.
거북 발도 있고, 꼬리도 있고, 귀갑도 있습니다. 비록 어설픈 솜씨지만, 필요한 것은 그런대로 갖추었습니다.
- 머릿돌
비신의 비액(碑額)에 '용암서원'(龍巖書院)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머릿돌에는 태극무늬가 있습니다.
- 사당
사당인 숭도사(崇道祠)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은 노장적(老莊的)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하였습니다.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밖으로 과단성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는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 곳곳에서 당시 폐정(弊政)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었고, 현실 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弊政改革)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였습니다.
- 전사청
남명 조식 선생 사후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남명 조식 선생의 문인들은 경상우도(慶尙右道,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진주, 합천 등지를 중심으로 남명학파(南冥學派)를 형성하였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문인들은 경상좌도(慶尙左道, 경상도 동부 지역)에서 안동 지방을 중심으로 퇴계학파(退溪學派)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로써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선조 22년(1589년)에 발생한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양쪽 문인들은 정치적으로 북인(北人, 남명학파)과 남인(南人, 퇴계학파)으로 나누어져 대립하였습니다. 그리고 남명 조식 선생의 문인들은 정인홍의 회·퇴배척(晦退排斥)과 독주로 인해 남명학파의 한 축이던 정구가 떨어져 나가고 정온(鄭蘊) 등이 분립하는 등 내부의 분열을 겪었고,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정인홍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로써 남명학파(南冥學派)는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겨우 진주 일대에 잔존하는 데 그쳤습니다.
- 남명매 후계목
산청 시천면 산천재(山天齋) 앞마당에 수령이 460년 되는 매화나무가 있습니다. 남명 조식 선생이 산천재를 짓고 기념으로 심었다고 하여 '남명매'(南冥梅)라고 합니다. 이 후계목이 사당 뜰 한쪽에 있습니다.
- 뇌룡정
용암서원 바로 남쪽에 뇌룡정(雷龍亭)이 있습니다. <장자(莊子)>의 재유(在宥)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옵니다. '뇌룡'(雷龍)이란 정자 이름은 이 글귀에서 따왔습니다.
시동(尸童: 옛날 신주가 없이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을 대신하여 제사상 앞에 소상처럼 앉아있는 아이)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용처럼 광채가 나타나고(尸居而龍見), 말없이 고요히 침묵하여도 덕(德)은 우렛소리와 같아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淵默而雷聲).
남명 조식 선생은 48세(1548년) 때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61세(1561년) 때까지 강학에 힘썼습니다.
- 뇌룡정
남명 조식 선생은 평생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했지만, 불의를 보면 등천하는 용처럼 불끈 일어나 전제왕권을 향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판하였습니다. 당시 국정을 강하게 비판한 상소문인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를 뇌룡사에서 썼습니다.
뇌룡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 용암서원의 부속 건물로 이건 되었고, 용암서원이 훼철된 후 1883년에 조희규·신두선 현감과 유림인 허유, 정재규 등의 발의로 원래 장소인 이곳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뇌룡정'이라 쓴 현판 글씨는 그 당시 학자인 하용제의 글씨입니다.
- 남명 조식 선생 생가터
토동 마을 안쪽을 들어가면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터가 있습니다.
남명 조식 선생은 연산군 7년(1501년)에 이곳 토동(兎洞, 톳골)에서 아버지 조언형(曺彦亨)과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가는 합천 삼가면 하판리 지동(갓골)이고, 토동은 외가입니다. 다섯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고, 아버지가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하였습니다.
- 남명 조식 선생 생가터 옛 모습(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는 원래 안채, 아래채,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의 지붕 개량사업으로 초가집들을 슬레이트로 개량하던 1970년에 안채와 아래채는 헐리게 되었고 사랑채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 남명 조식 선생 생가터
지금 생가터에는 번듯한 기와집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최근에 복원한 건물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건물이 얼마나 옛 모습을 재현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보기만 좋으면 원래 모습은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남명 조식 선생 생가터
생가터 안으로 들어가려니 대문이 잠겨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까치발을 하고 담장 너머 생가터 모습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립니다.
아래에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전문이 있습니다. 긴 글이지만, 찬찬히 한 번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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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전문
선무랑(宣務郞: 종6품 품계)으로 새로 단성현감(丹城縣監: 종6품직)에 제수된 신 조식,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왕(先王)께서 신의 변변치 못함을 모르시고 처음 참봉(參奉: 종9품직)직을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후에 주부(主簿: 종6품직)를 두 번씩이나 제수하시었고 이번에 다시 현감에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한 것이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임금 앞에 나아가 하늘과 같은 은혜에 사례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이 인재를 취하는 것이 장인(匠人)이 심산대택(深山大澤)을 두루 살펴 재목이 될 만한 나무를 빠뜨리지 않고 다 취하여 큰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대장(大匠)이 나무를 취하는 것이지 나무가 스스로 쓰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취하시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책무이니, 신은 그 점에 대한 염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감히 큰 은혜를 사사로이 여길 수는 없으나 머뭇거리면서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끝내 측석(側席: 곁 자리) 아래에서 감히 주달(奏達: 임금께 아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나아가기 어렵게 여기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신의 나이 육십에 가까웠으나, 학술이 거칠어 문장은 병과(丙科: 과거 급제 마지막 등급)의 반열에도 끼지 못하고 행실은 물을 뿌리고 빗질하는 일을 맡기에도 부족합니다. 과거 공부에 종사한 지 10여 년에 세 번이나 낙방하고 물러났으니, 당초에 과거를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설사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조급한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하고 큰일을 할 만한 온전한 인재가 아니온데, 하물며 그 사람의 됨됨이가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는 과거를 보려고 하는가 하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미천한 신이 분수에 넘치는 헛된 명성으로 집사(執事: 신하)를 그르쳤고 집사는 헛된 명성을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는데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떤 사람이라 여기십니까. 도(道)가 있다고 여기십니까, 문장(文章)에 능하다고 여기십니까. 문장에 능한 자라 하여 반드시 도가 있는 것은 아니며, 도가 있는 자가 반드시 신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전하께서만 모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재상들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모르고서 기용하였다가 훗날 나라의 수치가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미천한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이름으로 출세를 하는 것보다는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저버렸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일백 년이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 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 충의(忠義)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해 나아갈 수 없어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아래의 소관(小官: 하급 관리)은 시시덕거리면서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위의 대관(大官: 상급 관리)은 어물거리면서 뇌물을 챙겨 재물만을 불리면서 근본 병통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신(內臣: 내관직 관리)은 자기의 세력을 심어서 못 속의 용처럼 세력을 독점하고 외신(外臣: 외관직 관리)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 들여 들판의 이리처럼 날뛰니, 이는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은 생각에 장탄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밤이면 멍하게 천정을 쳐다보고 한탄하며 아픈 가슴을 억누른 지가 오래입니다.
자전(慈殿: 문정대비)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하지만 역시 깊은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종류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강물이 마르고 곡식이 비 오듯 내리니, 이것은 무슨 조짐이겠습니까. 음악 소리는 슬프고 소복을 입었으니 이미 흉한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해서는 아무리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재주를 겸한 자가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인데, 더구나 초개(草塏: 지푸라기) 같은 일개 미천한 자의 재질로 어찌하겠습니까. 위로는 위태로움을 만분의 일도 구원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털끝만큼의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가 되기가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찮은 명성을 팔아 전하의 관작(官爵: 관직과 작위)을 사고 녹(祿: 녹봉)을 먹으면서 맡은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이 보건대 근래 변방에 변(變)이 있어 여러 대부(大夫)가 제때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번 사변은 20년 전에 비롯되었지만, 전하의 신무(神武)하심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으로,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서 사람을 임용하여 재물만 모으고 민심을 흩어지게 하였으므로, 필경 장수 중에는 장수다운 장수가 없고 성(城)에는 군졸다운 군졸이 없게 되었으니 적들이 무인지경처럼 들어온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대마도(對馬島)의 왜놈들이 몰래 향도(向導: 앞잡이)와 결탁하여 만고의 무궁한 치욕을 끼친 것인데, 왕의 위엄을 떨치지 못하고 담이 무너지듯 패(敗)하였으니, 이는 구신(舊臣: 오랜 신하)을 대우하는 의(義)는 주(周)나라 법보다도 엄(嚴)하면서도 구적(仇賊: 원수)을 총애하는 은덕은 도리어 망한 송(宋)나라보다 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종(世宗)께서 남정(南征)을 하시고 성종(成宗)께서 북벌(北伐)을 하신 일을 보더라도 언제 오늘날과 같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겉에 생긴 병에 불과하고 속에 생긴 병은 아닙니다. 속병이란 걸리고 막히어 상하(上下)가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경대부(卿大夫: 신하)가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도록 분주하게 수고하는 것입니다.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으고 국사(國事)를 정돈하는 것은 구구한 정형(政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전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알지 못하겠으나,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따라 존망(存亡)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어느 날 척연히 놀라 깨닫고 분연히 학문에 힘을 써서 홀연히 덕(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를 얻게 된다면,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 속에는 모든 선(善)이 갖추어 있고 모든 덕화(德化)도 이것에서 나오게 될 것이니, 이를 들어서 시행하면 나라를 고루 공평하게 할 수 있고 백성을 화평하게 할 수 있으며, 위태로움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요체(要諦: 요점)를 보존하면 모든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공평하게 헤아릴 수 있어 사특(嗣慝: 간사하고 못됨)한 생각이 없어질 것입니다. 불씨(佛氏: 불교)가 말한 진정(眞定)이란 것도 이 마음을 보존하는 데 있을 뿐이니,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데는 유(儒)와 불(佛)이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인사(人事)를 행하는 데 있어 실제 실천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 유가(儒家)에서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도(佛道)를 좋아하시니, 만약 그 마음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이는 우리 유가의 일이니, 어렸을 때 잃어버렸던 집을 찾아와서 부모와 친척, 그리고 형제와 친구를 만나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군다나 정사(政事)를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고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자신 몸을 닦음으로써 하는 것이며, 몸을 닦는 것은 도(道)로써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자신 몸을 닦음으로써 하신다면 유악(帷幄: 진영)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사직(社稷)을 보위하는 사람들일 것인데 아무 일도 모르는 소신 같은 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겉만 보고 취한다면 잠잘 때 이외에는 모두 속이고 등지는 무리일 것인데, 이 경우에도 앞뒤가 막힌 보잘것없는 신 같은 자가 또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의 덕화가 왕도(王道)의 경지에 이르게 되신다면 신도 마부의 말석(末席)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전하를 섬길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를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왕도의 법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왕도의 법이 법답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삼가 밝게 살피소서. 신 조식, 황송함을 가누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