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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복사지

 

남원 시내에서 순창으로 가는 24번 국도의 왕정동 도로변에 큰 절터가 있습니다. 만복사지(萬福寺址)입니다.

이곳은 덕유산에서 뻗어내린 교룡산의 남쪽 자락입니다. 절터 뒤로 산자락이 나지막하게 감싸고, 앞으로는 요천(蓼川)이 흘러갑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옛날에는 남원 시가지가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만복사(萬福寺)는 남원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합니다.

 

- 만복사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에 만복사는 고려 문종 재위 때(1046~1083)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절 이름은 부처님께 정성으로 기원하면 누구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만복사(萬福寺)라 하였습니다.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년)에 왜구에 의해 불에 탔고, 숙종 4년(1678년)에 남원부사 정동설(鄭東卨)이 중창하려 했지만 규모가 워낙 커서 예전처럼 복원하지는 못하고 승방 1동을 지어 그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그 후 돌보는 이가 없어 폐사되었습니다.

 

1979년부터 7년간 전북대 박물관팀이 발굴 조사하였습니다. 발굴 조사 결과 만복사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창건 후 몇 차례 중창되면서 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쪽에 각각 금당이 들어선 1탑 3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독특한 가람 배치를 하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 석인상

 

석인상은 원래 당간지주에서 남쪽으로 4m 떨어진 곳에 2기가 나란히 있었다고 합니다. 도로변에 노출되어 있어 사고 위험이 큰 석인상 1기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석인상은 노기를 띤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허리에 옷 주름이 묶여 있고, 발은 옷자락에 가려진 채 간략히 처리되었습니다.

 

- 석인상

 

머리 부분은 정수리에 육계와 같은 둥근 머리채가 있고, 귀는 길고, 눈썹은 치켜 올라가고, 눈방울이 튀어나왔습니다. 화를 내는 표정입니다. 몸은 반나체이고, 구부린 팔목과 팔뚝에 팔찌를 찼습니다.

 

- 석인상

 

석인상은 전체 높이가 5.5m이고, 화강암 사각기둥의 3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나머지 한 면은 조각 없이 밋밋하며, 머리에서 1.22m 내려온 곳과 3.18m 내려온 곳에 당간지주의 간공(杆孔)과 같은 깊이 24cm, 폭 13cm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 복원도(사진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석인상은 당간지주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절터에서 이 석인상과 짝을 이루는 또 다른 석인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석인상은 크기와 모양이 같고, 석재가 짧았던지 목 부분에서 돌기를 만들어 몸체에 끼워 맞추었습니다. 몸체의 두 구멍 가운데 아래쪽 구멍 바로 밑이 절단되어 있었는데, 도로 공사를 하던 중에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절터 맨 앞쪽에 있습니다.

 

-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화강암으로 된 높이 3m의 장방형 돌기둥입니다. 흙에 묻힌 받침부를 고려하면 전체 높이는 5m 정도일 것으로 보입니다.

 

별다른 장식이 없고, 꼭대기의 바깥쪽 부분을 둥글게 굴려 모를 죽였습니다. 꼭대기 안쪽으로는 사각에 가까운 모양의 간구(杆溝)가 있고, 지주 아래쪽과 위쪽에 둥근 모양의 간공(杆孔)이 있습니다. 하부 구조는 땅속에 묻혀 있어 그 형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창건 당시인 고려 시대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석등 하대석

 

중문지와 목탑지의 사이에 석등 하대석이 있습니다. 윗면 가운데에 간주석을 끼울 수 있는 홈이 있습니다. 

 

- 돌계단

 

목탑지 돌계단은 뒤편 하나만 옛 모습대로 남아 있습니다.

 

- 석등 하대석

 

목탑지와 북금당지 사이에 석등 하대석이 있습니다. 하대석 윗면 가운데에 홈이 있고, 그 바깥에 복련이 있습니다.

 

- 서금당지

 

서금당지입니다. 석조대좌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거대한 청동 불상을 모신 이층 법당이 있었습니다.

 

- 석조대좌

 

석조대좌는 높이 1.5m 되는 거대한 불상 대좌입니다. 커다란 돌 하나에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을 새겨 만들었습니다. 불상 대좌는 보통 팔각형이나 사각형, 원형인데, 이 대좌는 육각형입니다.

 

이 대좌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35척(尺, 1척은 약 30.3cm)의 청동 불상을 모셨습니다. 절이 창건된 고려 문종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부분

 

대좌에는 하대저석의 면석에 안상무늬가 2개씩 있고, 안상무늬 안에 따로 귀꽃이 있습니다. 그 위의 경사진 하대석에 복련이 있습니다.

 

- 부분

 

하대석보다 너비가 줄어든 중대석에는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으로 면석이 이분되었는데, 아무런 장식도 없습니다. 상대석에는 앙련이 있음 직합니다. 그러나 파손되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습니다.

 

- 부분

 

상대석은 지름이 2.4m 정도입니다. 윗면에 불상과 대좌를 연결하는 데 쓰였을 사방 30cm쯤 되는 네모난 홈이 있습니다.

 

- 만복사지

 

만복사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한문 소설 <만복사 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춘향전>과 달리 남자가 절개를 지키는 내용으로, 살아 있는 남자인 양생과 죽은 처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렸습니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남원에 양생이라는 늙은 총각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만복사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외로이 살고 있었습니다. 양생은 젊은 아낙네와 처녀들이 모여 탑돌이하기 전날, 불당의 부처님에게 배필을 구해달라고 빌다가 부처님과 저포(樗蒲, 백제 때 있었던 윷과 비슷한 놀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기에서 진 부처님은 그에게 탑돌이를 하러 온 처녀와 사랑을 하도록 주선하였는데, 그 처녀는 난리 중에 원통하게 죽은 처녀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며칠간의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귀신 처녀는 저세상으로 돌아가고 양생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장가들지 않고 처녀의 명복을 빌면서 여생을 마쳤습니다.

 

 

* 글은 <답사여행의 길잡이>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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