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주 법천사터한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가을날 찾은 법천사터는 황량하기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텅 빈 절터가 발굴조사 때문인지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어 더욱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법천사(法泉寺)는 원래 '법고사(法皐寺)'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법천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신라 성덕왕 24년(725년)에 창건된 이 절은 고려시대에 들어서 지광국사(智光國師) 때에 이르러 고개 너머에 있는 거돈사와 함께 당대 최고의 절로 발전하였습니다. 법천사는 이름 그대로 한때 진리가 샘물처럼 솟았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 폐사되어 지금은 정적만이 가득합니다. 법천사터로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는 마을의 내력을 말해주듯 수령이 수백 년이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 원주 흥법사터 강원도 원주 일원에는 약 100여 개의 절터가 있다고 전합니다. 그 가운데 흥법사터는 영봉산(靈鳳山, 403m)에서 흘러내린 작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야트막한 언덕 앞쪽으로는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과 문막읍이 내려다보입니다. 이곳 절터 대부분은 논밭으로 변했고, 몇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 흥법사터의 옛 모습 흥법사(興法寺)의 창건이나 중창, 그리고 폐사 시기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에 흥법사 부도비가 진공대사비(眞空大師碑)이며,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세워졌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흥법사 부도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으니, 절은 이미 통일신라 말에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권46 원주목(原州牧) 불우조(佛宇條)에 "흥법사는 건등산..
- 강릉 굴산사터 부도와 절터 굴산사(崛山寺)는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가 신라 문성왕 9년(847년)에 창건한 절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본산이었습니다. 절의 창건과 관련해서 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범일이 당나라에서 유학 생활을 할 당시에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왼쪽 귀가 떨어진 한 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이 말하기를 "저도 역시 고향 사람입니다. 집은 명주(溟州, 강원도 강릉 일대) 부근 익령현(翼嶺縣, 강원도 양양군 일대) 덕기방(德耆坊)에 있사오니, 조사께서 훗날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꼭 저의 집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귀국 후 범일국사는 그 스님의 뜻에 따라 사굴산 아래에 굴산사를 창건하였다. 당시 굴산사는 강릉 일대에서 가장 큰 절이었고,..
- 선림원터 양양 미천골 계곡 깊숙이 있는 선림원터는 꿈에 그리던 곳입니다. 그곳은 언젠가 한 번은 꼭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던 곳입니다.절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고, 빈 절터에는 탑과 석등과 부도 및 부도비만이 남았습니다. 깊고 깊은 산 속 이곳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절터 앞을 흐르는 냇물 소리뿐입니다. 이보다 더한 적막감과 호젓함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서서 느껴지는 막막하기만 한 이 느낌을 아득히 먼 옛적에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느꼈을까요? 천 년이 넘는 오래전에 있었던 이곳 절 이름을 선림원(禪林院)이라고 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아 끊임없이 정진하는 데에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요? - 선림원터 이런저런 상념을..
- 진전사터 삼층석탑 강원도 양양에 있는 진전사터(陳田寺址)를 언젠가는 꼭 한 번은 찾아가리라 마음먹은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하루 만에 차로 다녀오기가 어려워 계속 차일피일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일이 그렇듯 마음만 있으면 언젠가 기회는 생기는 법..., 생각지도 않게 그곳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쩌다 2박 3일로 처가 식구들과 함께 강원도 대관령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진전사터를 찾아갈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다만, 문제는 모든 사람이 절터를 찾아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생각대로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곳까지 갔는데 선림원터와 진전사터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2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