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양 선림원터 석등 선림원터 석등은 선림원터의 서쪽 언덕 위에 있습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높이는 약 2.9m입니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 아래에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상륜부를 얹었습니다. 이 석등 역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 형식을 따르면서도 간주석의 형태가 독특합니다. - 선림원터 석등지대석(地臺石) 위에 팔각의 하대받침을 올려 놓았습니다. 하대받침 옆면에는 1구씩 안상(眼象)무늬를 새겼습니다. 그 위로 단판(單瓣)의 아래로 드리운 연꽃무늬가 새겨진 하대석이 있고, 연꽃무늬마다 큼직한 귀꽃이 붙어 있습니다. 그 위로 다시 구름무늬를 새긴 단과 굄돌이 있어 간주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 양양 선림원터 홍각선사탑비 선림원터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가 있습니다. 이 탑비는 신라 정강왕 원년(886년)에 홍각선사(弘覺禪師)의 공로를 기려 세운 것입니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받침인 거북 머리의 귀부(龜趺)와 비몸, 그리고 비머릿돌로 되어 있습니다. 이 탑비의 원래 비몸은 파편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최근에 새로 만든 비몸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비의 파편에 기록된 내용과 에 의하면 경전에 해박하여 당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 귀부의 앞모습 귀부의 머리는 용의 형상입니다. 정수리 부분에 어떤 장식이 있었던 듯 길쭉한 홈이 파여 있습니다. 날카롭게 세운 발톱은 네 개이며, 네 발에는 날아갈 듯 ..
- 양양 선림원터 부도 선림원터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기단부만 덩그러니 남은 부도가 하나 있습니다. 이 부도는 원래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두고, 그 위에 탑신부·상륜부를 차례로 놓았던 것인데, 지금은 탑신부·상륜부는 없어지고 기단부만 남았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만 해도 1.2m이니 원래 크기는 상당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재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습니다. 원래 위치는 뒷산 중턱으로 50m쯤 올라간 곳이라고 합니다. 부도가 만들어진 시기는 이곳에 남아 있는 홍각선사 탑비(弘覺禪師塔碑)와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신라 정강왕 원년(886년)으로 추정됩니다. - 세부 부도의 맨 아랫부분을 보면 네모난 지대석과 팔각형의 ..
- 양양 선림원터선림원터는 미천골 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산골짜기 좁은 길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선림원(禪林院)이라는 이름으로 깊디깊은 산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스님들의 수도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선림원은 신라 애장왕 5년(804년) 순응법사(順應法師)가 세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은 1948년에 이곳에서 출토되어 월정사에 보관하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범종에 804년 순응법사가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인사를 세운 스님이 바로 순응법사이니 창건 당시 선림원은 화엄종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9세기 중엽 홍각선사(弘覺禪師)가 대대적으로 중수하면서 선종사찰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절터에 남아 있는 부도비, 부도, 석등, 삼층석탑들은 모두 9세기 후..
- 선림원터 양양 미천골 계곡 깊숙이 있는 선림원터는 꿈에 그리던 곳입니다. 그곳은 언젠가 한 번은 꼭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던 곳입니다.절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고, 빈 절터에는 탑과 석등과 부도 및 부도비만이 남았습니다. 깊고 깊은 산 속 이곳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절터 앞을 흐르는 냇물 소리뿐입니다. 이보다 더한 적막감과 호젓함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서서 느껴지는 막막하기만 한 이 느낌을 아득히 먼 옛적에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느꼈을까요? 천 년이 넘는 오래전에 있었던 이곳 절 이름을 선림원(禪林院)이라고 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아 끊임없이 정진하는 데에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요? - 선림원터 이런저런 상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