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양정사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南沙) 마을에 사양정사(泗陽精舍)가 있습니다. 사양정사는 1920년대에 세워진 근대 한옥입니다. 이 건물은 유학자 계제(溪齋) 정제용(鄭濟鎔, 1865~1907)의 아들 정덕용과 장손 정정화가 남사(南沙)로 옮겨온 후 선친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재실입니다. 건물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입니다. 양쪽 끝으로는 각각 1칸의 마루가 있으며, 계자난간을 두었습니다. 두 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방이 오른편에 2칸, 왼편에 1칸이 있습니다 - 사양정사 건물 정면에 '사양정사(泗陽精舍)'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사양정사(泗陽精舍)란 '사수(泗水) 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사수(泗水)는 공자(孔子..

- 현경문 부산 화지산(華池山) 자락에 동래 정씨(東萊鄭氏) 대종중 소유의 화지공원(華池公園)이 있습니다. 화지공원에 정묘사(鄭墓祠)가 있습니다. 정묘사는 동래 정씨 사당(祠堂)을 말합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솟을삼문 현경문(顯景門)을 지나야 합니다. - 정묘사로 가는 길 정묘사로 가는 길은 호젓한 숲길입니다. - 정치화 청덕거사비 정묘사로 가는 도중 길옆에 비석이 하나 있습니다. 정치화 청덕거사비(鄭致和淸德去思碑)입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동래부사 정치화(鄭致和)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입니다. 비의 앞면에 '부사 정공치화 청덕거사비(府使鄭公致和淸德去思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습니다. 그 좌측에 '9세손 행부사(行府使) 정인학(鄭寅學)이 을미년(乙未年)에 세웠다'고 적혀 있습니다. 을미년은 ..

- 광산서당 창녕군 유어면의 남쪽 지역에 광산리(光山里)가 있습니다.광산(光山)은 400여 년 된 마을입니다. 광정(光頂)이라고도 했는데, '빛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앞산 꼬장뱅이산(光頂山)이 꽃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화존(花存)에서 '꽃(花)'이 '광(光)'으로 음차되어 광존(光存)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곳 이름이 광정(光頂)이나 광존(光存)에서 광산(光山)으로 변했다 하겠습니다. 이곳 대동 마을 이강(梨岡)에 광산서당(光山書堂)이 있습니다. - 광산서당 광산서당의 전신은 광산서원(光山書院)입니다. 광산서원은 정조 19년(1795년)에 어촌(漁村) 양훤(楊晅, 1597∼1650)을 향사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고종 5년(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훼철된 ..

- 활수문 김해 은하사(銀河寺)로 가는 길목에 삼방동(三芳洞)이 있습니다. 이곳 신어천(神魚川) 가에 관천재(觀川齋)가 있습니다. 관천재 대문은 활수문(活水門)입니다. 솟을삼문입니다. 이 문은 보통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관천재 앞에 관리사(管理舍)가 있습니다. 마침 그곳에 사람이 있어 부탁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 관천재 관천재(觀川齋)는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김해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이대형(李大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입니다. - 관천재 이대형(李大亨, 1543~1592)은 자(字)는 태래(泰來), 호(號)는 관천(觀川), 본관은 재령(載寧)입니다.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동래성을 점령한 뒤 ..

- 광산서당 창녕 유어면 광산리 대동마을 북쪽에 광산서당(光山書堂)이 있습니다. 광산서당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사와 싸우기 위해 창녕 일대의 의병을 모아 출정한 양훤(楊喧, 1597~1650)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웠습니다. 광산서당의 전신은 광산서원(光山書院)입니다. 서원은 광산마을에 있었고, 양훤을 배향하였습니다. 정조 때인 1795년에 세워졌고,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습니다. 광산서원이 철폐되고 나서 생긴 것이 광산서당입니다. - 배롱나무 서당 앞뜰에 예사롭지 않은 배롱나무가 있습니다. - 배롱나무 여름날의 무더위 기승을 부리는 지금... 배롱나무꽃이 한창입니다. - 배롱나무 배롱나무 가지마다 불타는 듯 빨갛게 꽃이 피었습니다. - 땅에 떨어진 배롱나무꽃 배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