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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산청 척화비

sky_lover_ 2017. 5. 8. 07:56

- 산청 척화비


청 척화비는 산청초등학교에 있습니다.


조선 말에 있었던 서구 열강의 천주교 승인과 통상 개방 압력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는 군사력 대결을 초래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쇄국정책을 택했고, 이런 정치적 상황이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쇄국 의지를 모든 국민에게 알리고 경각심을 강화할 목적으로 전국의 중요 통로와 지점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산청에도 척화비가 세워졌습니다.


- 산청 척화비


산청 척화비는 고종 8년(1871년)에 세워졌습니다.


원래는 사람의 왕래가 잦았던 환아정(換鵞亭; 산청군청에서 남서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있었음) 뜰에 세워졌으나,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인들이 두 조각으로 깨뜨려 땅에 묻었습니다. 그 후에 산청초등학교 교사를 신축할 때 발견되어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 산청 척화비


비는 거북을 본뜬 듯한 단조로운 모습의 받침돌 위에 윗변 양쪽을 비스듬히 다듬은 비신이 있습니다.


- 귀부


귀부의 모습입니다. 석공의 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는지 귀부 머리가 꽤 우스꽝스럽습니다.


- 귀부


귀부 옆모습입니다. 머리는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것 같은데, 별로 그래 보이지 않습니다.


- 비신


비신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자손만년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지어 신미년에 세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 산청 척화비


지금 우리가 처한 국제정세는 척화비를 세웠던 조선 말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북한은 지속적인 핵개발로 위협하고, 이러한 북한의 도발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틈에 끼인 우리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난처한 처지입니다.


조선 말 조선은 열강들의 침입에 맞서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택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열강에 그저 문을 닫아걸기만 했지 나라를 지킬 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결과로 약 40년 뒤 일본에 나라를 강탈당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아픈 역사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역사가 역사로만 머물고, 역사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또다시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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