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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보살입상, 8세기 후반(통일신라시대), 높이 34cm


산시립박물관에는 을 놓고 바라보게 하는 보살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동보살입상입니다. 비록 대좌와 광배는 없어졌지만, 정면을 향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보살상의 체는 탄력성있게 묘사되었으며, 풍만한 가슴에서 가는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이 아름답습니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위로 하였고, 왼손은 내려 손바닥을 아래로 하였습니다. 수인은 아미타인을 하였습니다. 양어깨에 천의 자락이 걸쳐 발아래까지 늘어져 있습니다. 하체에는 옷주름이 좌우대칭 U자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양팔에 팔찌와 팔뚝찌를 한 것 외에 신체에는 다른 장식은 없습니다.


- 세부


머리에 난 턱과 구멍은 별도의 보관을 끼워 고정했던 흔적입니다. 단정히 빗어 상투를 튼 머리 일부는 보관으로 가려지는 부분이라 그랬는지 머릿결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풍만한 얼굴에 반쯤 뜬 눈, 반달모양의 눈썹, 오뚝한 코, 꼭 다문 작은 입술을 하였습니다. 다소 굳은 듯한 표정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잔잔한 미소가 엿보입니다. 귀는 아래로 길게 내려와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합니다.


- 금동보살입상


왼쪽 옆모습입니다.


- 금동보살입상


오른쪽 옆모습입니다. 


- 세부


옆 머리카락 몇 가닥이 모여 아래로 흘러내리다가 원을 그리며 귓바퀴를 가로질러 뒤로 넘어 올라가 있습니다. 옆머리에는 별도의 보관을 끼워 고정했던 구멍이 있습니다. 이런 구멍이 앞머리와 양 옆머리에 각각 1개씩 있습니다.


- 세부


팔에는 팔찌와 꽃장식이 있는 팔뚝찌를 착용했습니다.


- 금동보살입상


뒷모습입니다.


왼쪽 천의 자락 일부가 끊어져 없어졌습니다. 뒷면의 허리 부분에는 광배꽂이가 있고, 뒷면의 머리와 엉덩이 부분에는 주조 구멍이 있습니다. 이 주조 구멍은 작고 단정합니다.


- 금동보살입상


금동보살입상이 부산시립박물관에 있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박유성 전 부산시립박물관장의 글을 가져와 정리했습니다.)


1978년 봄 부산시립박물관은 변변한 유물 한 점 없이 거의 맨주먹으로 개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부산시에서는 시립박물관을 대표할 유물은 이미 점쳐두고 있었지만, 구매할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산시는 시립박물관의 발전을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부산지역 재력가들을 중심으로 자문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이들로부터 협조를 얻어 이 유물을 구매하겠다는 것이 부산시의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부산시청 2층 회의실에서 시립박물관 자문위원회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를 마친 뒤 부산시 기획관리실장 김화섭 씨와 문화재과장 김부환 씨가 원로기업인 김지태 회장이 찾는다는 말에 려 올라갔습니다. 김 회장은 "뒷방 늙은이를 위원장에 앉힐 때는 뭔가 노린 게 있었을 것 아닌가? 소장하고 있는 물건이 한 점도 없는데 위원장이 됐으니 구매해서라도 한 점은 내놔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을 먼저 꺼냈습니다. 그러면서 대뜸 "좋은 물건이 뭐 없느냐?'고 말을 이었습니다.


김 과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있긴 있는데, 가격이 비싸서…" 라며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그러자 김 회장은 "이 사람아,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도대체 얼마짜린데?"라고 말했습니다. 김 과장은 갑자기 일이 잘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장님 1억 원 정도 됩니다." 이 말에 김 회장은 반쯤 감았던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나흘만 말미를 주게."라고 말하곤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 나흘 동안 김 회장은 그 유물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유물에 대한 평가를 부산대 모 교수 등에게 부탁했습니다.

나흘 뒤 김 회장은
김 과장을 불러 "내가 장사꾼 아닌가. 장사꾼이 달라는 대로 주나… 30%만 깎게. 돈은 회삿돈이 아니라 내 돈으로 준다고 하게."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 유물은 7,000만 원에 흥정이 됐고, 김 회장은 7,00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건네주며 물건을 구매해 부산시립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그래서 1978년 7월 11일 부산시립박물관은 무사히 개관을 맞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유물이 바로 지금 부산시립박물관의 얼굴이 된 금동보살입상입니다.

부산시가 금동보살입상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71년 동산문화재 등록을 통해서였습니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을 일제히 등록하던 과정에서 금동보살입상을 소유하고 있던 오재균 씨도 등록신청을 했습니다. 그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목포에서 크게 성공하였는데, 한국전쟁 뒤 부산에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문화재를 수집했습니다.

금동보살입상은 해방 전 목포에 있는 일본인 골동품상이 갖고 있던 것을 해외로 빼돌리기 전에 오 씨가 입수하였습니다. 천의 자락이 두 어깨에 걸쳐 발아래까지 부드럽게 늘어져 있는 이 불상은 왼쪽 천의 일부가 끊어져 손상된 채 발견됐습니다. 지리산 남쪽의 어느 절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할 뿐 구체적인 경위는 알 수 없었습니다.


금동보살입상의 가치를 알고 있던 오 씨는 부산시를 통해 문화재등록을 하면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신청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부산시는 2년에 걸친 오랜 감정을 거쳐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 지정신청을 했지만, 뒤로는 심사보류를 거듭 요청했습니다. 국보로 지정되면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산시는 인수를 준비 중이니 시에서 유물을 확보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협조요청을 했습니다.

부산시는 김 회장의 기증으로 유물을 확보한 뒤 1979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신청을 했고, 나흘 만에 국보 제200호로 지정됐습니다. 그 뒤 30억 원을 주고도 못살 물건을 부산시가 거저 주웠다는 말이 골동품상 주변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금동보살입상이 부산시립박물관에 있게 된 데는 오 씨의 공도 큽니다.


오 씨는 호암미술관 등 서울에서 유물을 팔라는 교섭이 수차례 있었지만, 수십 년을 그대로 간직했다가 헐값이나 다름없는 가격에 김 회장에게 팔았습니다. 당시 중앙동에 시가 1억5천만 원대의 빌딩을 갖고 있던 서울의 건물주가 이 건물과 불상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의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이 불상이 부산에 남아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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