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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 봉림사터

터를 찾아가는 데에 어느 계절이 제일 좋을까요?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겠지만, 겨울만큼 좋은 때가 있을까요? 어느 계절이 겨울만큼
절터의 황량함을 절절히 느끼게 할 수 있을까요? 절터를 찾는 데는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절터 하면 먼저 황량함과 적적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봉림사터는 훌륭한 절터입니다.


- 봉림사터 입구

봉림사터는 창원골프장 부근 봉림산 품속에 있습니다.

창원 봉림동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봉림사터로 가는 길의 입구를 찾지 못해 한동안 헤맸습니다. 봉림사터는 봉림휴먼시아 아파트 단지의 왼쪽 옆으로 난 길을 지나 산골짜기 따라 제법 올라간 곳에 있습니다.


- 봉림사터 입구의 대나무숲

봉림사터 바로 앞에는 얼마간 숲길이 있습니다. 호젓한 오솔길인 이 숲길의 양옆으로 대나무숲이 있습니다. 그래서 겨울철임에도 주위는 녹음이 우거져 있습니다.

- 봉림사터

봉림사(鳳林寺)는 지금은 폐허로 변해버렸지만, 한때는 선종의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절은
통일신라시대 진경대사
(眞鏡大師) 심희(審希, 854~923년)가 진례성 제군사 김율희의 협력으로 진성여왕 8년(894년)께 창건했습니다. 이후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파를 형성하였으며, 심희와 제자인 찬유(璨幽) 등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쳤습니다. 그리하여 신라 경명왕 대에서 고려 광종 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들의 귀의를 받은 대찰로 번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월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무상한 법입니다. 한때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였던 이곳도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억새만이 무심하게 철 따라 피었다가 집니다.


-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왼쪽),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가운데), 봉림사터 삼층석탑(오른쪽)

봉림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의 비문 내용을 통해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심희는 신라 경문왕 8년(868년)에 혜목산 고달사에 주석하고 있던 원감국사(圓鑑國師) 현욱(玄昱, 787~869년)에게 계를 받았습니다. 19세 이후로는 명산과 절경을 탐방하였으며, 34∼44세에 송계(松溪)와 설악산 등지에서 참선하였습니다. 그 뒤 난리를 피하여 명주(溟州)의 산사에서 머물다 김해의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내려왔습니다. 이렇게 김해 진례(進禮)에 온 심희는 이곳 호족인 김율희의 도움으로 옛터를 보수하여 봉림사를 일으켰습니다.


이곳에 있던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석탑은 모두 다른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통일신라시대 말의 진경대사 보월능공탑과 탑비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져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고려시대의 이곳 삼층석탑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창원 상북초등학교 운동장 옆 뜰에 있습니다.


- 표지석

이제 봉림사터에서 절터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나마 이곳이 절터였음을 말해주는 것은 안내판과 표지석뿐입니다.


표지석에는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지(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址)'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옆면에 대정
(大正) 8년(1919년) 3월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표지석은 그해 12월에 세워졌습니다.


- 절터 내의 무덤

봉림사의 폐사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183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봉림사는 고려 광종 이후 쇠퇴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즉 임진왜란 이후로 버려진 절터로 잊혔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경상도읍지의 기록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듯
절터에는 무덤 1기가 있습니다.

약 200년 전 밀양에 사는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여주 이씨들이 봉림사터가 명당임을 알고 묘를 쓰려 하였으나 이곳 승려들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에 시신이 들어 있지 않은 상여 3개를 만들어서 가로막는 승려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그 틈에 시신이 들어 있는 상여를 몰래 운반하여 이곳에 묘를 썼습니다. 그 뒤로 절이 폐허가 되었다고 합니다.


- 무덤에서 내려다본 봉림사터

봉림사터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라고 합니다. '봉황이 둥지에서 알을 품는 형국(鳳巢抱卵形)'이라고 합니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들며,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봉림사터 주위는 대나무 숲으로 되어 있고, 예전엔 절 아랫마을에 벽오동 숲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덧없습니다.
명당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옛 봉림사가 그렇고, 그리고 이곳의 무덤 또한 그렇습니다. 풍수지리학자인 최원석은 그의 글에서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천시(天時)에는 어쩔 수 없듯 조선시대에 들어서 봉림사는 폐사되고 말았다. 그 연유는 임란 때 왜적의 침입과 조선왕조의 억불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경내에 버젓이 있는 사묘(私墓)는 어인 영문인가? 명당으로 알려진 폐사지에 묘가 들어서지 않은 사례가 별로 없지만, 봉림사터의 경우 의도적으로 봉황의 혈이 맺는 통로인 부리 부분에 묘를 들여놓았다. 그 주인공은 전라좌수사를 지낸 이모(李謀)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대했던 부귀영달은커녕 파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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