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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여러 부도와 부도비가 올망졸망 사이좋게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鳳林寺 眞鏡大師 寶月凌空塔)도 있습니다.
이 부도는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의 진경대사 심희(審希, 855~923)의 부도입니다. 높이는 2.9m로,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원래는 창원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에 경복궁 경내로 옮겼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 기단부
기단부는
상·중·하대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팔각의 하대석에는 면마다 안상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중대석을 받치고 있는 받침에 불꽃
모양으로 솟은 장식이 있습니다. 중대석은 납작한 북 모양을 하였습니다. 이곳에 도드라지게 꽃문양을 새겨 띠 장식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상대석에는 앙련이
두텁게 새겨져
있는데, 꽃잎마다 그 속에 꽃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 탑신부와 상륜부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습니다. 무척 단조로운 모습입니다.
지붕돌도 몸돌처럼 단순합니다. 굵직한 지붕선이
꼭대기에서 아래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었으나, 섬세한 기왓골은 생략되었습니다. 그래도 전각(轉角)에는
귀꽃이 달렸는데, 대부분 부서졌습니다. 상륜부에는 양화(仰花)와 보주(寶珠)가 있습니다.
-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사진 출처:
문화재청)
진경대사 부도와 함께 부도비도
있습니다. 이 부도비는 높이가 3.37m로, 부도와 함께 1919년 경복궁으로 옮겨졌습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고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화재청의 사진을 대신 가져왔습니다.
이수의 전액(篆額)에는
'고진경대사비(故眞鏡大師碑)'라 되어 있습니다. 제액 위에는 화염에 싸여 있는 여의주가 있고, 제액 양쪽에는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다투고
있습니다. 비문은 신라 경명왕이 직접 짓고, 문하승 행기(幸期)가 쓴 글씨를 문하승 성휴(性休)가 새겼으며,
제액은 최인연(崔仁渷)이 썼습니다.
비신 양옆에는 흔치 않게도 구름에
싸인 용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귀부는 입에 여의주를 물었고, 등에는 귀갑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귀부의
목은 짧고, 머리를 곧추세워 긴장감을 유지하려 했으나, 조각 솜씨는 형식화되고 간소화되었습니다. 신라 경명왕 8년(924년)에
세워졌습니다.
- 봉림사터 삼층석탑
봉림사터에는 부도와 부도비
외에 탑도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북초등학교에 있습니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할 목적으로 부산으로
팔려갔다가 다시 봉림사터로 되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돌보지 않아 많이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0년 창원교육청에서
상북초등학교로 옮겨 세웠습니다.
- 봉림사터.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가 있던 곳의
표지석
지금 봉림사터에는 이곳이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봉림사터임을 알려주는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부도와 부도비를 옮기면서 남긴 것으로 보이는 표지석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부도와
부도비의 주인인 진경대사는 어떤 스님이었을까요? 이곳에 있었던 부도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경대사 심희는 김유신의 후손으로, 문성왕 17년(855)에 태어나 9살에 혜목산에 있는 원감대사 현욱을 찾아가
19살에 계를 받았다. 이후 전국을 순례하였고, 888년에서 898년까지 강진군에서 참선하는 동안 그에게 배우려는 사람이 비 오듯 모였으며,
설악에 잠시 머물 때에도 선객들이 몰려들어 어디를 가더라도 숨지를 못하였다. 얼마 후 김해의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길을
떠났는데, 김해의 세력가였던 김율희가 그를 맞아 절을 고쳐주며 법을 간곡히 청하므로, 이곳 이름을 봉림(鳳林)이라고 고치고 선문을 열었다.
대사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고자 생각하고 가르침을 베풀고 있을 때 경명왕의 부름이 있는 까닭에 절을 떠나 왕성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법회를 열어 여러 사람을 깨우치고 법을 전하였다. 경명왕 7년(923) 2월 24일 이른 아침, 대중에게 '모든 법은 다 공하고, 온갖 인연은
다 고요한 것이니, 말하자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완연히 떠가는 구름과 같다. 너희는 부지런히 중생을 교화하고 삼가 슬퍼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돌아가니 나이 칠십이요, 승려의 나이 오십이었다. 이에 경명왕이 대사의 시호를 '진경대사'라고 하고, '보월능공'이라는 탑
이름을 내렸다.
- 봉림사터
봉림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의 중심사찰이었습니다.
183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봉림사는 고려 광종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봉림사 폐사와 관련해서 또 다른 이야기가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언적의 후손인 여주 이씨들이 밀양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봉림사가 명당임을 알고 묘를 쓰려 하였으나
스님들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여주 이씨들은 선친이 별세하자 시신이 들어 있지 않은 상여 3개를 만들어서 가로막는
스님들을 유인하였고, 그 틈에 시신이 들어 있는 상여를 운반하여 묘를 썼습니다. 그 뒤로 절은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여주 이씨
가문에서 절을 불태워서겠지요.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가문 역시도 망했다고 합니다. 약 200년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향화(香火)와 등불이 꺼진 후
이곳은 폐허로
변했습니다. 그나마 자리를 지켰던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석탑마저 다른 곳으로 옮겨간 후 잡초만 무성한 곳이 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진경대사 부도는 이런 봉림사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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