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구룡포 공원의 사자상
구룡포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남긴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일본인 가옥거리라고 부르는
곳과 구룡포 공원이 바로 그곳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구룡포에 집단거주지를 만든 다음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구룡포 공원입니다.
구룡포 공원 충혼탑 입구 양쪽에는 일제강점기 때 세운
사자상이 있습니다. 당시 이곳에 신사가 있었고, 사자상은 신사를 지키기 위해 세웠습니다. 그런데 광복이 된 지 7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이 사자상은 다른 것도 아닌 호국영령들을 추모하여 세운
충혼탑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 구룡포 공원의 일본인 공덕비
구룡포 공원에는 도가와 야스부로라는 일본인의 공덕비도
있습니다.
도가와 야스부로는 구룡포 방파제와 구룡포-포항 간 도로 개설 등에 공이 있었다고 합니다.
비석은 일본에서 가져온 규화목으로 만들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세운 다른 비와는 달리 파손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비석에 새긴 글은 시멘트를 발라 지워버렸습니다.
- 구룡포 공원의 부동명왕상
구룡포 공원 용왕각 앞에는 석불입상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석불은
대정 6년(1917년)에 일본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석불 아래에 부동명왕((不動明王)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부동명왕은 대일여래의 화신으로, 일체의 악마와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분노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 구룡포 공원에서 바라본
구룡포항
구룡포는 일제강점기 때 급격히 발전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인 운수업자인 도가와 야스브로가 총독부를 움직여
배를 댈 만한 정박시설이 거의 없는 이곳에 항만시설과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구룡포에 우리나라 배는 물론 일본 배까지 모여들어 동해안
최대의 항구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구룡포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룡포가 1942년에 인천과 같이 읍으로 승격된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 구룡포회 명부 속의 구룡포항 모습
소화 53년 2월의 구룡포 원거주자 명부 모습입니다. 소화 53년이면 1978년에 해당합니다. 이
명부 겉표지에 구룡포항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습니다. 언제 사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1930년 구룡포 지도
1930년 구룡포 시가지를 그린 지도입니다. 대충 보아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구룡포 공원이 있는 이 일대는 지금 일본인 가옥거리로 불립니다.
일제강점기 때 가장 번화했던 곳입니다. 우체국, 지서, 관공서 등 모든 공공건물이 모여 있었던, 그야말로 구룡포 중심 동네였습니다.
이곳은 삼각형 집이 많아 삼각구 마치라고도 했고, 싸움이 잦아 텍사스 골목이라고 했다고도 합니다. 물론 술집도 즐비했고, 홍등가도
십여 개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 구룡포 근대역사관
일본인 가옥거리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입니다.
이 건물은 원래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의 2층 살림집으로, 당시 그의 부와 명성에 걸맞게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최근 포항시에 의해 이 일대가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거리로 조성되면서,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건물 안에는
당시 생활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포항시는 소위 구룡포
역사거리라고 하는 이곳에 적지 않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요? 그리고 이곳을 둘러본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요?
'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태2년'명 납석제호 (0) | 2013.03.18 |
---|---|
용명리 삼층석탑은 변함이 없다. (0) | 2013.03.16 |
함안 제일의 누각, 악양루 (0) | 2013.03.13 |
이거사터 비로자나불좌상 (0) | 2013.03.12 |
경주 남산 천동골 천동탑 (0) | 2013.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