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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삼랑진 작원관

sky_lover_ 2012. 9. 1. 08:05

- 작원관

금은 그 빛이 많이 바랬지만, 예로부터 삼랑진은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은 수로와 육로가 거쳐 지나가는 길목이었습니다. 그런 흔적들을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는 곳이 작원관입니다.

산이 높아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 하여 까치 '작'()자를 취하였고, 여행하던 관원들이 쉬어 가는 역원이라 하여 '원'()자를 취했으며, 그리고 나루터와 관문의 기능을 갖춘 곳이라 하여 '작원관'(鵲院關)으로 이름 하였습니다. 이곳고려시대부터 요새를 두었던 곳으로, 문경 새재 조령관과 더불어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제일 관문이었습니다.

1939년에 경부선 부설 때 작원관 한남문이 있었던 자리에 작원관문기지비(鵲院關門基址)를 세웠고, 1995년에는 작원관을 복원하였습니다. 복원된 작원관은 성문 한남문과 문루 공운루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작원관은 이곳에서 700~800m 아래쪽 천태산 노적봉 아래 조금 못 가서 있었다고 합니다.

- 작원관위령탑

이곳 언덕 제일 높은 곳에 작원관위령탑이 낙동강을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이 탑은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순절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이곳은 물금 원동을 거쳐 밀양으로 넘어가는 좁고 험한 강변길인 작원잔도(鵲院棧道)가 있었던 곳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밀양부사 박진이 이끄는 조선군의 저항 때문에 험난한 작원잔도를 통과할 수 없자 우회하여 육로와 산을 타고 내려와서 후방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조선군은 퇴각하면서 응천강(밀양강)에 익사하는 등 거의 모두가 순절했습니다.

- 작원대교비(왼쪽)와 작원진석교비(오른쪽)

이곳 비각 내에는 3개의 비가 있습니다. 작원대교비, 작원진석교비, 그리고 작원관문기지비입니다.


먼저 작원대교비(鵲院大橋碑)는 조선 인조 20년(1642년)에 작원포에 다리를 놓은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어산(萬魚山)에서 흘러온 물이 낙강(洛江, 낙동강)에 드는 곳이 작원포(鵲院浦)인데, 서울에서 동래로 가는 자는 모두 이리로 간다. 옛날부터 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다녔는데) 쉽게 무너지니 율동(栗洞 , 삼랑진읍 율동리) 청룡(靑龍, 삼랑진읍 용전리?) 두 동네 사람들이 노역을 도맡아 했다. (…)
이에 사람들을 모집하여 돌을 깎아 이어서 다리를 만들었는데, 율동과 청룡 두 마을 사람들이 각각 3년 동안 나와서 일했다. (1640년) 초 1월에 시작하여 (1642년) 4월에 끝이 났다. 공사에 든 돈과 노역을 충당하였으니 진실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 그때 노역한 사람들과 공인 덕분에 일이 무사히 마쳤으니 그 일을 기록하여 돌에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함이다. 이후에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읽어 보면 착한 마음에 유연히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이에 새기노라.
 
한편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는
자줏빛 사암으로 만들어져 붉은 색깔을 띠고 있습니다. 조선 숙종 16년(1690년)에 세웠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리는 대로에 접하므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 옛날부터 나무로 만들었더니 보수하거나 허물어질 때마다 사람들이 노역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안태에 사는 동지(同知) 오인발(吳仁發)이 분개하며 한탄하더니 스스로 화주가 되어 몇 년 만에 드디어 석교가 완성됐다. 재물이 소모된 것이나 인력이 투입된 것은 세세히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는 다만 한 시대 한 고을 거주민들을 무사하게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온 세상 길손들이 지나는 곳이 됐으니 영원히 칭송할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뒤에 같이 그 일을 주동한 사람은 오홍건(吳弘健)과 □병□ 그 사람이다. 안태리 200호가 2월에 노역을 시작하여 8월에 이르러 7달 만에 끝났다. 숙종 16년(1690년)인 강희(康熙) 29년 경오 9월에 세웠다.


- 작원관 주위 풍경

작원관위령탑이 있는 언덕에 올라 주위를 둘러봅니다. 낙동강과 그 너머 김해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집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원'조에 작원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밀양)부의 동쪽 41리
에 있다. 원으로부터 남으로 5~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의 연못인데 물빛이 짙은 푸른빛이고 사람들은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서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員墜岩)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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