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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영천 하천재와 신도비각

sky_lover_ 2024. 11. 10. 06:37

- 하천재

 

영천 강호정(江湖亭) 북쪽에 하천재(夏泉齋)와 신도비각이 있습니다.

 

하천재는 오천 정씨(烏川鄭氏) 문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인조 15년(1637년)에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 1535~1612)의 손자인 진주목사(晋州牧使) 정호인(鄭好仁, 1597~1655)이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 건물은 그 뒤에 중건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도비각에는 강의공 신도비가 있습니다. 강의공 정세아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고 강호정사(江湖精舍)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아 덕망이 높았던 선비였습니다.

 

- 추원당

 

하천재 뒤편에 추원당(追遠堂)이 있습니다.

 

추원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입니다. 건물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전면에는 쪽마루를 놓았는데, 좌·우측 온돌방의 쪽마루는 한 단 높게 하였습니다.

 

- 신도비각

 

추원당의 좌측 후면의 산기슭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습니다.

 

비각은 주위에 방형(方形)의 토석 담장을 두르고, 정면 중앙에 협문을 두어 출입하게 하였습니다.

 

- 신도비각

 

비각은 1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입니다. 4면의 처마 밑에는 활주(活柱)를 세웠습니다.

 

- 강의공 신도비 (사진 출처: 불교중앙박물관)

 

비각 내에는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 1535~1612)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강의(剛義)'는 정세아의 시호입니다. 이 신도비는 영조 36년(1760년)에 세워졌습니다.

 

- 신도비 탁본 앞면과 옆면 (사진 출처: 불교중앙박물관)

 

신도비 앞면에는 상부에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라는 전서체 비명이 가로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아래에 세로로 13열의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 신도비 탁본 뒷면과 옆면 (사진 출처: 불교중앙박물관)

 

신도비 뒷면에는 상부에 '정공신도비(鄭公神道碑)'라는 전서체 비명이 가로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아래에 세로로 13열의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도비 양 옆면에는 '명(銘)'과 '호수(湖叟)'라는 전서체 비명이 가로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전서체 비명 전체를 연결하면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호수(湖叟) 정공신도비명(鄭公神道碑)'입니다.

 

- 강의공 신도비

 

비문은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1685~1757)가 청하여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썼습니다. 비문 중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조수(鳥獸)와 산림(山林)은 공(公)이 멀리 숨었다 하고,

병마(兵馬)와 병기(兵器)는 공이 잘 싸웠다 말하네.

자벌레처럼 굽히기도 하고, 매와 같이 날기도 하였으니,

그 시대가 그러했다.

공이 무엇을 구했겠는가?

무릇 그 의(義)를 행하였다.

구름처럼 산 위에서 나와 삼농(三農)을 윤택하게 하고,

폈다가 거두어서 태공(太空)으로 돌아갔도다.

월성(月城)의 싸움에서 장수가 쥐처럼 숨어 버리고,

포위망을 넘나들며 공을 구출하다가 아들이 난리에서 순절하였으니,

아버지는 충성하고, 아들은 효도하도다.

 

- 하천재

 

하천재는 추원당을 중심으로 '一' 자형 건물 4동이 튼 '口' 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천재 너머 먼 산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때는 가을입니다.

 

소재지: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660-2.

 

(2024.11.3.)

 

蛇足) 夏泉齊舍記(하천재사기)

하천(夏泉) 한 언덕은 우리 13대조 선무랑(宣務郞) 공 이하 골육(骨肉)을 대대로 장사한 곳이니, 곧 풍수들이 말하는 오지탄금형혈1)이며, 장(場)은 이 좌장혈2)인데, 물 어귀 밖으로는 긴 등이 이 거문고의 몸체이니 넓이는 백여 보가 되고 길이는 그 2배가 넘는다.

처음 이 터를 얻을 적에는 12대조 노촌(魯村) 공께서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한 곳에 산소 터를 잡아 장사 날이 되기 전에 미리 광중을 파고 친히 흙을 채로 치고 있을 적에 마침 스님 한 사람3)이 그 앞을 지나가다가 그 제자와 더불어 사사로이 말하기를 "저 상주는 좌우에 사람이 많은 데에도 육덕(六德)을 갖춘 사람으로서 몸소 흙을 치고 있으니, 그 정성스러운 효심으로 좋은 터를 얻을 수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여기다가 터를 잡았나?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좋은 터를 두고서..."라고 하는 말을 한 일꾼이 듣고 상주에게 말하니, 상주가 그 스님의 뒤를 쫓아가서 만나 말하기를 "스님께서 조금 전에 지나가면서 무슨 말씀을 한 것을 이미 내가 들었는데, 그 길지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원컨데 스님께서 어버이를 위하는 이 사람을 위해서 그 한 자리를 아끼지 마소서." 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상주의 정성스러운 효성을 보고 가히 좋은 터를 얻을 수 있다고 말 한 바가 있었는데, 상주가 과연 이미 들었고 이제 또 정성스럽고 간절함이 이와 같으니 내가 가리켜 보이리라." 하고 같이 가서 점지하니 거기가 바로 이 하천 언덕이다. 오직 모든 일을 한결같이 스님의 말을 따라 장사 지내고, 그 후에 자손 대대로 여기에 장사하니, 지금에 와서 70여 분이나 된다. 재사를 처음 세운 때가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나, 처음에는 승려들에게 수호하게 하였는데, 5~6십 년 후로부터는 속인(俗人)으로 바꾸어 때에 마땅하게 수호하였다. 재실은 무릇 십여 기둥으로써 나의 이목으로 보는 바로는 80여 년간이라 기억되는데, 재사의 결함에 따라서 수시로 보수한 것이 지금까지 세 번이나 된다. 아! 옛날 범중엄(范仲淹)이 종족을 위하여 전지(田地)와 집을 두고서 명분의 뜻을 말하기를 "우리 가문의 종족이 매우 많은데, 나에게는 진실로 친하고 소원함이 있으나, 우리 조상들이 보면 고루 이 자손이 진실로 친하고 소원함이 없다."고 할 것이니 내 어찌 구휼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아! 우리가 이 영천에 사는 사람이 범씨의 문중 사람보다 적지 않으며, 조상들의 골육 무덤도 범씨가 뜻한 고장보다 더 소중하거늘, 곧 겨울이나 봄에 제사 받드는 계절에 이 재실에 들어가서 제사 받드는 데 주선하는 자리로 하는 것은 조상께서 이 자손의 마음을 고르게 생각해서 친하고 소원한 사이나 길고 짧음을 비교하지 않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울타리가 되어 감싸주면, 이 재사가 우리 종족에게 소중한 것이 어찌 다만 범씨가 뜻한 전택(田宅)에 그치겠는가? 조상의 오르내리는 영혼이 즐겨하여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도 뒤가 있노라!" 할 것이니, 각각 스스로 힘써서 재사를 세운 본뜻을 저버림이 없을진저!

 

계축년(1973년) 상원일(上元日) 13세손 진태(鎭泰) 삼가 지음

註) 1. 오지탄금형혈: 다섯 손가락으로 거문고를 타는 형국의 혈.
    2. 좌장혈: 왼손바닥혈.
    3. 스님: 설학대사를 말함.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르내려 온 신선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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