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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서원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용산서원(龍山書院)이 있습니다. 용산서원은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1568~1637)을 추모하여 세워진 서원입니다.

 

잠와 최진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최계종(崔繼宗)과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하였고, 정유재란 때도 왜군과 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이 되었습니다. 그 후 병자호란 때 나이 칠십에도 불구하고 출정하여 싸우다 순절하였습니다.

 

용산서원은 무신을 기리는 서원으로, 드문 경우입니다. 또한, 제사와 강학(講學)이라는 통상적인 서원 기능 외에 주민에 대한 대출 등 금융 기능과 빈민 구제 역할도 하였습니다.

 

- 청풍루

 

최근에 새로 세워진 누각 청풍루(淸風樓)입니다. 청풍루는 용산서원의 출입문 역할을 합니다.

 

- 민고당

 

청풍루를 들어서면, 강당 건물민고당(敏古堂)이 있습니다.

 

- 민고당

 

민고당 앞에 서면, '용산서원(龍山書院)'이라고 쓴 편액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 필치가 마치 용이 춤을 추는 듯합니다.

 

편액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이고, 특이하게 틀 부분을 녹색으로 칠했습니다. 편액의 글씨를 쓴 사람은 옥동(玉洞) 이서(李潊, 1662~1723)입니다옥동 이서는 조선 고유의 서풍이라 할 동국진체(東國眞體)를 개척한 명필입니다. 옥동 이서가 이곳에 편액 글씨를 남긴 연유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당시 후손들은 잠와 최진립을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여러모로 공을 들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여러 정파의 인물로부터 신도비명이나 신도비 발문 등을 받았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편액 글씨는 근기남인(近畿南人)이며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형인 당대 명필 옥동 이서로부터 받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 숭렬사

 

민고당 뒤편에 잠와 최진립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숭렬사(崇烈祠)가 있습니다.

 

- 편액

 

숭렬사에 걸려 있는 편액입니다. 이 편액은 '용산서원' 편액과 반대로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임금이 내리는 사액 편액이기 때문입니다.

 

이 편액 글씨도 옥동 이서가 썼습니다. 편액에는 큰 글씨로 '숭렬사우(崇烈祠宇)'라고 쓰고, 부기로 작은 글씨로 '숭정후육십칠년구월 사액(崇禎後六十七年九月 賜額)'이라고 적었습니다.

 

용산서원은 숙종 37년(1711년)에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런데 '숭정후육십칠년'은 1694년을 말합니다. 당시는 서원이 세워지기 전입니다. '숭정후십칠년'과 관련해 후손 최채량 씨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사액 결정은 1694년에 있었고, 옥동 이서의 편액 글씨도 그때 썼다. 그러나 당시는 사당이 세워지기 전이고, (1699년에) 사당 세워진 후인 1711년에 사액 편액을 만들어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습니다.

 

- 회화나무

 

용산서원 앞에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 은행나무

 

도랑을 가운데 두고 회화나무 맞은편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300년 되었습니다. 용산서원이 세워질 때 함께 심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은행나무는 용산서원과 함께 해온 나무입니다.

 

- 은행나무

 

수령: 300년. 높이: 16m. 가슴높이 둘레: 1.2m.
소재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92.

 

(202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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