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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어변당과 적룡지
집
안에 자그마한 연못과 거기에 걸맞은 작은 집, 그리고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 그런 곳은 운치가 있어 마음이 끌립니다. 그래서 그런 곳을 알게
되면 나도 모르게 자꾸 관심이 가게 되고, 결국은 찾아가게 됩니다.
밀양 무안면 연상리에 있는 어변당(魚變堂)도 그런 곳입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초기의 장수였던 박곤이 무예와 학문을 닦았던
곳입니다. 지금 이곳에는 어변당 말고도 덕연서원(德淵書院)과 충효사(忠孝祠) 같은 건물이 있습니다. 사실 이
건물들이 더 크고 화려하지만, 그래도 눈길을 끄는 것은 어변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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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변당 현판
박곤(朴坤, 1397∼?)은 밀성 박씨 태사공파(太師公派) 박언부(朴彦孚)의 11대손으로,
박의번(朴義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21세 때인 태종 17년(1417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고, 관직은 이천현감, 공조참의, 호조참판, 한성판윤,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세종 1년(1419년) 최윤덕 장군을 따라 대마도 정벌에 나서서 큰 공을 세웠고,
세종 6년(1424년) 첨절제사(僉節制使)의 명을 받아
북방 야인의 침입을 평정하고 육진을 설치하였습니다. 세종
7년(1425년) 명나라 사신의 종사관으로 갔는데, 황제가 그의 사람됨을 보고 신하로 두고자 높은 벼슬을 내렸으나 고사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미인 세 명을 얻어 그곳에서 세 아들을 낳았고, 이들은 표(瓢)씨의 성을 얻어 살았습니다.
세종 10년(1428년) 삼남 지방에 왜구의 침범이 잦자
귀국하였으며, 이후 첨총제, 공조참의, 호조참의, 전라도 관찰사, 호조참판, 한성판윤, 예조참판을
역임하였습니다. 세종 22년(1440년)에 의금부 판사를 끝으로 낙향하였으며, 말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어변당과 적룡지
어변당(魚變堂)은 박곤이 고향으로 내려온 1440년경에 지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효종
2년(1651년)에 중수하였고, 영조 30년(1754년)에 중건하였습니다.
앞에 네모난 연못을 두었고, 그 폭에 맞추어 건물을
지었습니다. 2칸 대청과 온돌방 1칸을 두었으며, 대청의
옆면으로 출입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앞뒤로는 툇마루를 두었는데, 앞에만 계자난간을 둘렀습니다.
어변당 앞에 있는 연못을 적룡지(赤龍池)라고 합니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박곤이 뜰에 연못을 파고 아침저녁으로 물고기에게 밥을 넣어주며 지성으로 길러서
부모님께 봉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물고기 한 마리가 붉은 비늘을 남기고 용이 되어 승천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 연못은
적룡지(赤龍池)라 하였고, 건물은 어변당(魚變堂)이라 하였습니다.
- 어변당 은행나무
적룡지 옆에는 박곤이 심었다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이 은행나무는
약 40년 전에 벼락을 맞아 그 모습이 많이 상했습니다. 지금 옆으로 새 가지가 자라고 있으나, 볼품없기는
여전합니다.
이런 은행나무의 모습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곳의 처지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유산으로 취급되어 잊혀가는 '충효사상'의 쇠락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세월의 흐름은 그렇게 그렇게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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