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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량리 은행나무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에 구량리(九良里)가 있습니다.
이곳은 본래 삼한시대 구리벌이라는 성읍국가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 후 구량벌(九良伐) 또는 구량화촌(九良火村)이라 하였습니다. 구량리라는 지명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 때 붙여졌습니다. 이곳 마을은 송정(松亭)과 중리(中里) 마을이 있습니다.
중리는 남중리(南中里)라고도 합니다. 이곳 마을 들판에 노거수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구량리 은행나무입니다. 어른쟁이 또는 언응쟁이라고도 하는 이 은행나무 아래에 재우(齋宇)인 이리재(二履齋)가 있었다고 합니다.
- 구량리 은행나무
구량리 은행나무는 2003년 태풍 매미로 수관(樹冠)의 1/3 정도가 훼손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나무의 전체적인 형태가 다소 손상되었습니다.
주위 환경으로 인해서인지, 은행나무는 가지 끝이 마르고 밑둥치가 썩어 들어가는 등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 유허비
구량리 은행나무 앞에 유허비 하나가 있습니다. '한성부 판윤 죽은 이공 유허비(漢城府判尹竹隱李公遺墟碑)'입니다. 죽은(竹隱) 이공(李公)은 이지대(李之帶)를 말합니다. 죽은(竹隱)은 이지대(李之帶)의 호입니다.
이지대는 고려 후기 학자이자 정치가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4세손입니다.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경상도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있으면서 왜구가 탄 배를 붙잡은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았습니다. 그 후 벼슬이 높아져 한성판윤(漢城府判, 현 서울시장)에 이르렀습니다.
단종 즉위년(1452년)에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울주로 내려와 살았습니다. 이때 서울에서 가져와 연못가에 심은 나무가 구량리 은행나무라고 합니다.
- 구량리 은행나무
구량천(九良川)은 본래 마을 앞으로 흘렀습니다.
죽은(竹隱) 이지대(李之帶)는 자손들에게 지변(地變)이 일어나서 냇물의 흐름이 바뀌어 마을 뒤로 흐르는 날에는 구량(九良)을 떠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큰 홍수로 냇물의 흐름이 바뀌어 마을 뒤로 흐르게 되자 월성 이씨(月城李氏)들이 경주로 흩어졌다고 전해옵니다.
- 구량리 은행나무
구량리 은행나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구량리 은행나무는 이씨를 제외한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훼손하면 해(害)를 입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은행나무 밑의 썩은 구멍에 아들을 낳지 못한 여자들이 정성을 들여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 구량리 은행나무
김종연 시인은 가을날 구량리 은행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구량리 은행나무 - 김종연
말 섞을 사람 없어 입에서 군내난다
개미처럼 작아진 엄마의 푸념처럼
가을날 파리한 잎은 해서체의 연서다
수직의 꿈 함께 늙고 전성시대 아득하다
초 분침 사라진 세상 맥박도 헐거워지고
저만치 어디쯤에서 희미해진 삶의 좌표
되짚어 본 시간 속 눈부신 절정 앞에
혼자, 웃다 눈물짓다 까치발로 서 보다
황금빛 등불을 건다 구량리 은행나무
- 구량리 은행나무
수령: 약 550년. 높이: 22.5m. 가슴높이 둘레: 8.3m.
소재지: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860.
(202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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