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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이언적을 제향한 옥산서원

sky_lover_ 2012. 5. 20. 07:25

- 역락문

언적이 한때 살았던 독락당 근처에 그를 제향한 옥산서원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이언적 사후 20년이 된 해인 선조 5년(1572년)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경주부윤 이재민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서 지금의 자리에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묘우(廟宇)를 건립하였고,
선조 7년(1574년)에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역락문(亦樂門)은 옥산서원 안으로 들어가는 첫 정문입니다. 문의 이름은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불역락호(不亦樂乎,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문은 굳게 닫혀 있어 드나들 수가 없습니다.

- 구인당

서원의 건물 배치는 앞쪽에 강학하는 장소를 두고, 뒤쪽에 사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이 일직선 상의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락문→무변루→암수재·민구재→구인당→체인묘 순으로 이어집니다.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가운데 3칸의 틔워 마루를 깔았고, 양옆의 한 칸은 온돌방을 놓았으며, 앞면에 창이나 문이 없이 벽으로 막혀 있습니다. 정면 가운데에 걸린 '옥산서원'이란 쓴 편액은 추사의 글씨입니다.

한편 구인당 앞마당 좌우로 있는 두 건물은 암수재(闇修齋)와 민구재(敏求齋)로,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하던 곳입니다.

- 무변루

무변루(無邊樓)는 정면 7칸, 측면 2칸, 2층 규모의 누각건물입니다.

아래위 가운데 3칸은 모두 틔워 출입문과 대청으로 활용하였고, 그 양쪽 1칸씩은 벽체로 막아 아래는 아궁이와 굴뚝을 두었고 위는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보통 다른 곳에선 편액이
건물 앞쪽에 걸려 있는 데 비해 이곳에선 뒤쪽에 걸려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구인당에 서서 앞으로 바라보면 무변루가 딱 가로막고 있습니다. 옥산서원이 넓게 트인 공간이 아니라 좁고 답답한 공간으로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러한 폐쇄성은 구인당 양옆에 있는 방의 앞면이 창이나 문이 없는 벽면만으로 되어 있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 옥산서원의 편액들. 구인당 정면에 걸린 편액(위), 구인당 내에 걸린 편액(가운데), 무변루에 걸린 편액(아래)

옥산서원에는 눈여겨볼 만한 편액이 몇 있습니다.

먼저 구인당(求仁堂) 정면에 걸려 있는 '옥산서원'이라 쓴 편액의 글씨는
헌종 5년(1839년)에 화재로 타버린 것을 추사 김정희가 다시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직전인 54세에 쓴 것입니다. 기교는 남김 없이 떨어져 나가고 굳센 힘만 가득해 '철판도 뚫을 듯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글씨입니다.

구인당 안쪽을 보면 '옥산서원'이라 쓴 편액이 하나 더 걸려 있습니다. 구인당이 불타기 전에 걸려 있었던 편액을 모각한 것입니다. 원래 걸려 있던 편액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고 합니다.

한편 무변루에 걸려있는 '무변루'라 쓴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이 쓴 것입니다. 편액의 한쪽에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라는 글이 부기되어 있습니다.

- 정료대

텅 빈 마당 한쪽에 정료대(庭燎臺)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야간 행사 때 이곳 마당을 밝히려고 관솔불을 피웠던 곳입니다.

- 이언적 신도비의 귀부(아래)와 이수(위)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둔 사당인
인묘(體仁廟) 옆에 이언적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이 신도비는 선조 10년(1577년)에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뜻을 모아 세웠습니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 글을 지었고,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글을 썼습니다.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당시의 것으로는 매우 뛰어난 편이며, 특히 이수에 새긴 용의 모습에 노란색과 푸른색으로 칠한 것이 눈길을 끕니다.

이 신도비는 원래 서원 앞 개울 옆에 있었으나, 그 후 훼손을 막기 위하여 서원 안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옥산서원 내에 있는 신도비 외에도 포항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1586년에 세운 신도비가 하나 더 있습니다.

- 옥산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

옥산서원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있습니다. 자계(紫溪)라고 부르는 개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자줏빛 시냇물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지금도 개울가에 숲과 너럭바위가 있어 운치를 더하지만, 개울물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자계'라는 이름만큼 그렇게 맑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상류에 저수지가 생겨 개울물이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놀다간 사람들 탓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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