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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의령 미연서원

sky_lover_ 2021. 6. 23. 04:18

- 미연서원

 

경남 의령은 애국충절의 고장입니다. 임진왜란 때 한양으로 향해 진군하던 왜군에 맞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일으켜 싸웠던 곳입니다. 이곳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을 기리는 미연서원(嵋淵書院)이 있습니다.

 

허목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경기도 연천을 주된 생활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그는 광해군 2년(1610년)부터 인조 원년(1623년)까지 13년간을 창녕, 의령 등 경상우도(​慶尙右道)에서 지냈고,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령으로 내려와 인조 23년(1645년)까지 10년간 지냈습니다. 이처럼 그가 한동안 의령에서 지내기는 하였지만, 그를 기리는 서원이 의령에 있는 것은 뜻밖의 일입니다.

 

- 인지문

 

미연서원은 의령군 대의면 중촌리 도로변에 있습니다. 정문은 인지문(仁智門)입니다. 솟을삼문입니다.

 

- 장판각

 

인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장판각이 있습니다.

 

장판각은 허목이 편찬한 <미수기언>(眉叟記言)의 목판 869매를 보관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이 목판은 지금 의령읍 의병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 서재

 

장판각 맞은편에 있는 건물입니다.

 

- 이의정

 

강당 역할을 하는 이의정(二宜亭)입니다.

 

이 건물은 허목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입니다. '이의'(二宜)는 산이 좋고 물이 좋아 산수 두 가지가 다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갖춘 기와집입니다.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왼쪽에 2칸 방, 오른쪽에 1칸 방이 있습니다.

 

- 이의정의 현판

 

이의정 정면에 걸려 있는 현판들입니다.

 

위에서부터 행서체로 '미연서원'(嵋淵書院), 해서체로 '이의정'(二宜亭), 전서체로 '이의정'(貳宜亭)이라고 썼습니다. 이 가운데 전서체로 쓴 현판 글씨는 허목의 전서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허목은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했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났습니다.

 

- 옆면

 

이의정 옆면 모습입니다. 방 주위로 돌아가며 쪽마루와 툇마루가 있습니다.

 

- 쪽마루

 

쪽마루 모습입니다.

 

- 뒷면

 

뒷면 모습입니다.

 

- 이의정

 

미연서원은 허목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세워졌습니다. 순조 25년(1825년)에 남인계 인사들과 양천 허씨(陽川許氏) 후손들의 발의로 행정리(杏亭里)에 세워졌습니다. 그 후 고종 5년(1868년)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자 허목의 영정은 후손이 사는 경기도 연천으로 옮겨졌습니다.

 

1901년에 후손들과 후학들이 뜻을 모아 중촌리(中村里)에 이의정이 중건되었고, 1920년에 위패를 봉안할 사당인 숭정사(崇正祠)와 <미수기언> 목판을 보관할 장판각이 세워졌습니다. 1975년에 서원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지금 미연서원의 건물은 인지문, 장판각, 이의정, 숭정사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 허목 진영

 

허목은 송시열(宋時烈)과 예학(禮學)에 대해 논쟁한 남인(南人)의 핵심 인물로, 조선 후기 사상계와 정치계를 이끌었습니다.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었을 때 청남의 영수였습니다. 그런데도 고결한 인품 덕분에 남인이 실각한 뒤에도 88세까지 천수를 누렸습니다.

 

그는 선조 28년(1595년)에 한양 동부 창선방(彰善坊)에서 현감 허교(許喬)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 손바닥에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자를 문보(文甫)라 하였고,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어서 호를 미수(眉叟)라 하였습니다.

 

허목의 학문은 서경덕(徐敬德)의 학문,  화담학파(花潭學派)의 학문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습니다. 서경덕의 학문은 성리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절충하는 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것이 특징인데, 허목은 이러한 성향에 영향받았습니다. 또한, 허목은 조식(曺植)과 정인홍(鄭仁弘)의 학문적 영향이 남아있는 경상우도에 머물면서 남명학파(南冥學派)의 학문도 수용하였습니다.

 

그는 주자 성리학을 중시하던 17세기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달리 원시 유학인 육경학(六經學)에 관심을 가졌고, 도가적인 성향도 깊이 드러냈으며, 불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선 후기 강성 정치인의 모습을 뚜렷이 하였으면서도 개성 있는 학문 세계를 추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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