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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연선사 부도

연한 봄날입니다. 그동안 어찌하다 보니 미처 찾지 못했던 부도를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합천군 가회면 대기마을로 향합니다. 그곳 마을회관 서쪽으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이 길은 묵방사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260m쯤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좁은 밭길이 나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부도 1기가 서 있습니다.

이 부도는 부도비가 없어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적연선사 부도로 알려졌습니다.
원래는 바로 위 능선 위에 있었는데, 조선시대 말에 산 주인이 선대의 무덤을 쓰려고 골짜기 아래로 넘어뜨렸다고 합니다. 그 후 홍수로 가벼운 것은 밀려 떠내려가 버리고 무거운 것만 그 주변에 남았다고 합니다.

이 부도를 적연선사 부도로 추정하게 된 것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탁본으로 남아 있는 <영암사 적연국사 자광탑비(靈巖寺寂然國師慈光塔碑)>의 비문에 의해서입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적연선사가 입적하자 영암사의 서쪽 산봉우리에 장사 지냈다고 합니다. 이곳은 영암사터로부터 1km 가까이 떨어져 있고, 영암사터의 남서쪽에 해당합니다.

 

- 적연선사 부도

부도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단정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몸돌과 상륜부는 없어졌고, 기단부와 지붕돌만 남았습니다. 지금의 몸돌은 무너졌던 부도를 다시 세우면서 새로 해 넣었습니다. 그래도 꽤 그럴싸합니다.

- 하대석

지대석은 네모꼴입니다. 기단부 하대석의 아래쪽에는 면마다 안상무늬 안에 사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자는 제각각의 자세로 있으며, 모두 여덟 마리입니다. 그 위쪽에는 구름과 서로 마주 보는 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 하대석의 사자

하대석의 사자 모습입니다. 사자는 머리를 앞쪽을 향한 채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날카로운 눈매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 하대석 윗면에 나 있는 구멍과 구름 문양

하대석 윗면의 모습입니다. 가운데에 3단의 각호각형 받침을 두어 중대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소용돌이치는 구름 문양이 얕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모서리 가까이에 윗면과 옆면이 통하는 구멍이 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대석 윗면에 고인 물이 쉽게 빠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 중대석

중대석에는 면석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뭔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마모가 심해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 상대석

상대석 아랫면은 위로 향한 두 겹으로 된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 모습이 활달하면서도 화려합니다.

- 지붕돌

지붕돌은 다소 간략화되었습니다. 서까래와 기왓골이 생략되었고, 귀마루만 표현되었습니다. 전각에서 끝이 살짝 들어 올려져 있고, 그곳에
앙증맞은 귀꽃이 달렸습니다.

- 적연선사 부도

이 부도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적연선사(932~1014)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속명은 김영준
(金英俊)이며, 경산(京山, 지금의 성주) 사람입니다. 13살 때에 정안현(定安縣, 지금의 장흥) 천관사(天關寺)에 있는 숭유화상(崇攸和尙)에게 출가하였고, 950년에 경성(京城) 흥국사(興國寺) 관단(官壇)에게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는 '오엽지초(五葉之草)'의 방향(芳香)을 찾아 도봉산 영국사(寧國寺) 혜거국사(慧炬國師)를 찾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오엽지초'란 달마 이후의 혜능에 의해 개화된 남종선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고려 광종 19년(968년) 3월에 중국에 건너가 오월국(吳越國)의 영명사(永明寺) 연수선사(延壽禪師, 904~976)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습니다. 그때 연수선사와 나눈 선문답의 내용이 비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수선사가 물었다. "자네는 어디 사람인가?" 적연선사는 "동국
(東國)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연수선사는 다시 물었다. "동국은 당국(唐國)과 같은가? 다른가?" 적연선사가 대답했다. "깨달은 사람에겐 동서(東西)가 따로 없습니다." 연수선사가 말했다. "이곳에 다녀가서 어떻게 동국 사람을 지도하겠는가?" 적연선사가 대답했다. "선사께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연수선사가 말했다. "사람이 시키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인가?" 적연선사가 대답했다. "선사께서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이에 연수선사가 이르기를,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느니라."라고 하였다. 어느 날 연수선사가 또 물었다. "색신(色身)은 질문하지 않거니와 어떤 것이 마음인가?" 적연선사가 대답했다. "어느 것이 질문하지 않는 색신입니까?" 이 말을 듣고 연수선사가 이르기를, "동국에서 진불(眞佛)이 출세하였다."라고 하였다.

광종 23년(972년)에 중국에서 귀국하자 광종(光宗)은 예의를 갖추어 예우하였고, 이듬해에 복림사(福林寺)의 주지로 임명하였습니다. 성종(成宗)은 선사의 법계를 올리고, 사자산사(師子山寺)의 주지로 모셨습니다. 목종(穆宗)은 개경에서 가까운 보법사(普法寺)의 주지로 모셨습니다. 현종(顯宗)은 대선사(大禪師)로 받들고, 내제석원(內帝釋院)의 주지로 모셨습니다. 내제석원은 왕의 행차가 잦고 연례적인 불교 행사가 자주 열린 곳으로, 왕실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절이었습니다.

현종 2년(1011년)에 적연선사는 노쇠함을 이유로 개경을 떠나 임천(林泉)으로 내려가기를 원했습니다. 왕도 만류할 수가 없어 가수현(嘉壽縣) 영암사(靈巖寺)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영암사에 있은 지 3년 만인 현종 5년(1014년) 6월 2일에 선사는 대종을 쳐서 대중들을 모아 놓고 입적하였습니다. 그달 28일에 영암사 서쪽 산봉우리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왕은 선사의 입적을 애도하여 시호(諡號)를 적연국사(寂然國師), 탑호(塔號)를 자광탑(慈光塔)이라 하였습니다. 탑비는 현종 14년(1023년)에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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